<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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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제1부 불타는 바다 땅끝에 선 사람들(28)밤바다를 등지고 방파제를 내려와 두 사람은 화순이 있는 유곽으로 오르는 길을 걸었었다.아파트에서 흘러나온 불빛들이 희미하게 발밑에 어른거리는 오르막 길을 걸으며 길남은 말이 없었다.
화순이 그의 손을 잡아 자신의 어깨에 놓았다.
『저쪽까지만 같이 가.』 그녀가 시키는대로 화순의 어깨에 팔을 돌려 안듯이 하고 길남은 걸었다.다른 사람이 된듯 고분고분한 목소리로 화순이 말했다.
『거기까지 갔다가,그 다음에 돌아가.거기서부터는 나 혼자 갈테니까.』 팔을 돌려 안고 있었기에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녀의몸이 와 닿으며 젖가슴이 뭉클뭉클 부딪쳤다.무엇에 취한듯 설레이면서 길남은 고개를 들어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내가 지금 여자랑 있는 거 아닌가.어쩌다 이 여자랑 이렇게 됐지. 하늘 이고 다니는 사람 개천에 빠진다더니,내가 지금 뭘하고 있는 거지.이 여자와 어쩌겠다는 거지.아니다.지금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 건 내가 더 잘 아는데,내가 무엇에 빠졌나홀렸나.게다가,이 여자는… 그냥 그렇게 사는,보통여 자도 아니지 않은가.
길남의 혼란스러움을 아는지 모르는지,길바닥을 내려다보며 화순이 나직나직 말했다.
『중이 급하면 부처 뒤에 숨는다던데,나 사는 거야 어디 의지할 데가 있나,마음 쏟을 데가 있나.』 길남의 목소리가 탁하게갈라져나왔다.
『그거야 다 마찬가지지요.』 『그래도 난 사람에게는 정 주지말자 하고 살았어.도둑놈 재워 주면 새벽에 쌀섬 지고 가는 거라지 않아.』 『꼭 그렇기만 할까요.』 『믿을 것도 못 믿을 것도 사람이니까.』 한숨처럼 중얼거리다가 갑자기 화순이 소리를죽이며 웃었다.
『좋은 세월 만나면 우리 같이 살아.한번 같이 살아봐.그런 말 하고 싶었던 남자인들 왜 없었겠어.그렇지만 그게 다 뭐겠어.풀 같지.한 해 지나면 시들고 죽는 풀이지.』 캄캄한 바다 쪽을 내려다보며 길남이 불쑥 말했다.
『난,아무 것도 몰라요.여자같은 건.』 화순이 그의 가슴에 얼굴을 부비듯 하면서 길남을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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