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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만에 풀린 국책사업 ‘보라호’機 추락 미스터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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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국책사업으로 추진 중이던 4인용 경비행기 ‘보라호’의 개발사업이 3년 전 중단됐다. 시험비행 도중 보라호가 추락했기 때문이다. 이 사고로 조종간을 잡은 한국항공대 은희봉(당시 47세) 교수와 비행 데이터 수집과 안전성 점검을 위해 동승한 황명신(당시 52세) 교수가 숨졌다. 이들은 인구 밀집 지역을 피해 기체를 착륙시키려 애쓰다 기체와 함께 산화해 언론에 크게 보도됐다. 그러나 정작 사고 원인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중앙SUNDAY가 사고 원인을 추적했다.

2004년 8월 27일 정오를 조금 앞둔 시각. 경기도 고양시의 한국항공대 활주로에서 경비행기 한 대가 이륙을 준비하고 있었다.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이 국책사업의 하나로 정부 예산 48억원을 지원받아 개발한 ‘보라호’. 길이 8.3m, 폭 10.8m, 무게 816㎏으로 민간 경비행기로서는 세계 최초로 전진익기(前進翼機) 설계가 도입됐다. 좌우 날개가 뒤쪽으로 45도 뻗은 후퇴익과 달리 전진익은 날개가 앞쪽으로 뻗어 있어 비행할 때 안정감이 뛰어나다.

이날 비행은 일주일 뒤 언론 공개를 앞둔,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시험비행이었다. 조종석에 앉은 두 교수는 1993년 민간 경비행기 개발에 참여한 이래 성능 시험비행을 도맡았다. 이날 기체 상태를 점검한 결과 엔진·계기판·전기장치 모두 정상이었다. 날씨도 비행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이륙 준비를 마친 보라호는 낮 12시18분 활주로를 미끄러지듯 달렸다.

보라호는 시험비행을 허가받은 일산 상공에 진입하기 위해 자유로 남측 한강변을 따라 고도를 3000피트(약 914m)까지 올렸다. 3~4분이 지났을까. 기체가 심하게 흔들렸고 ‘틱’하는 소리와 함께 꼬리날개가 동체에서 떨어져 나갔다. 보라호는 세 바퀴 정도 왼쪽으로 선회하다 낙엽 떨어지듯이 추락했다. 이륙 5분 만인 낮 12시23분쯤이었다. 사고는 순식간에 일어났다. 사고기는 관제탑과 교신도 하지 않았다. 레이더망에서 보라호가 사라지자 관제탑이 낮 12시35분쯤 호출했으나 사고기는 응답이 없었다. 추락을 멀리서 목격한 시민들이 119 구조대에 신고해 수색이 시작됐다.

일산신도시 진입로인 장항 나들목에서 300m 떨어진 지점에서 보라호의 몸통, 떨어져 나간 꼬리날개가 발견됐다. 두 교수는 조종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시험비행인 탓에 보라호에는 블랙박스나 녹음기 등이 장착돼 있지 않았다.

사고 직후 건설교통부 항공·철도사고조사위원회가 조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사건 발생 2년 만인 지난해 8월 ‘보라호 사고 조사 보고서’가 나왔다.

그러나 정부는 이를 언론에 적극적으로 알리지 않았다. 사고 당시 중요 기사로 취급했
던 언론도 더 이상 사고원인을 추적하지 않았다. 취재팀은 ‘보라호 사고조사보고서’를 단독 입수했다. 사고조사 보고서를 건넨 한 항공업계 관계자는 “중요한 국책사업을 무리하게 진행해 아까운 항공 전문가 두 명만 잃었다”며 “그런데도 정부는 사고조사를 끝내놓고도 이를 제대로 알릴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 것 같아 아쉽다”고 했다. 취재팀은 보고서를 토대로 당시 사고 원인과 문제점을 찾아내기 위해 항공업계와 관계 당국의 인사들을 인터뷰했다. 취재결과, 설계에서 시험비행까지 밀어붙이기 식으로 사업이 진행됐음을 알 수 있었다.

추락의 직접 원인은 꼬리날개 쪽의 수평 안정판, 수직 안정판 그리고 주날개와 꼬리날개(미익)를 연결하는 테일붐(tail boom)이 동체에서 떨어져 나간 것이었다. 꼬리날개 쪽의 ‘진동’이 시발이었다.

사고는 예견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보라호는 2개월 전인 2004년 6월 첫 시험비행 때 시속 95노트에 이르자 기체에서 상하 진동이 발생했다. 2차 시험비행 때 이 진동을 줄이기 위해 꼬리날개에 붙어 있는 승강타에 진동 완충장치 역할을 하는 쇠뭉치 모양의 ‘댐퍼(damper)’ 두 개를 붙였다. 그러나 3·4차 비행 때 시속 100노트에 이르자 진동이 다시 발생했고, 더 많은 저항을 견딜 수 있는 댐퍼로 바꿔 마지막 시험비행을 준비했던 것이다.

댐퍼를 부착하면 진동이 발생하는 것을 일시적으로 줄일 수 있다. 그러나 비행기 속도에 따른 공기 저항을 정확하게 계산하지 않고 추정한 데이터에 의존한 것이어서 근본적 치유책이 될 수 없었다. 진동을 줄이기 위해서는 기체 설계를 바꾸고 재료의 강도를 높여야 하지만 보라호는 일정에 쫓겨 무리하게 시험비행에 나섰다. 황 교수는 세 번째 시험비행 뒤 참관자들에게 “마치 말을 타는 것과 같은 진동을 느꼈으며 설계상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지적했으나 원인 조사도 이뤄지지 않았다. 보라호의 시험비행 기록부와 정비 기록부에 어떤 이상도 기록돼 있지 않았다는 점이 이를 입증한다.

그렇다면 기체 진동의 원인은 무엇일까? 사고 조사에 참여했던 한 위원은 “비행기가 고속으로 날면 공기 저항을 받아 심한 진동이 발생하는 플러터 현상이 나타난다. 이 플러터 현상을 줄이기 위해 기체 설계에 반영해야 하는데 보라호의 경우 부족했다”고 밝혔다. 그는 “특히 꼬리날개의 수평 안정판에 대한 정하중(아래 방향) 시험만 수행해 수평 꼬리날개와 수직 꼬리날개의 연결 부위에 대한 공기역학적 하중을 충분히 감안하지 못한 것이 진동 발생의 원인”이라고 덧붙였다.

익명을 요구한 항공업계의 한 관계자는 “보라호는 개발·제작 과정뿐 아니라 관리도 부실했다”고 지적했다. 보라호는 2004년 6월 7일 개발이 끝난 뒤 항공우주연구원의 프로젝트 책임자와 항공대학교 시험비행 책임자의 구두합의만으로 시험비행에 들어갔다. 시험비행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을 양측이 검토하고 대책을 마련할 시스템이 아예 가동되지 않은 것이다.

이 관계자는 또 “비행기 꼬리와 날개 부분이 변형되기는 했지만 미국 모 항공사의 레저용 비행기 모델을 차용한 것이다. 이미 세계 경비행기 시장에는 안정성이 입증된 유사 모델들이 나와 있는 마당에 보라호를 개발해 시장에 내놓았다 하더라도 경제성이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이런 사업에 50억원 가까운 예산을 들여 국책사업으로 끌고 나가는 것은 무리였다”며 보라호 개발 자체에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사실 항공우주연구원과 함께 보라호 개발사업을 진행하던 국내 한 업체는 8억원을 투자하고 사업을 중단하기도 했다.

한편 설계 일부가 변경되고 기체 제작업체 역시 중간에 바뀜으로써 제작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특히 새로 선정된 업체는 기술력과 품질보증 능력이 떨어졌던 것으로 조사에서 드러났다.

보라호 사고로 48억원이 들어간 전진익기 개발 사업은 허공에 날아갔다. 또 항공산업에 큰 공헌을 해온 두 명의 권위자를 잃는 안타까운 손실을 입었다. 항공우주연구원과 항공대학교는 유족들에게 각각 7억여원의 보상비와 성금을 전달하고 두 교수를 기리는 흉상을 건립했다. 정부는 과학기술 훈장을 추서했지만 국립묘지에 안장해 달라는 유족들의 요구는 관련 규정이 없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비극적 사고는 국내 항공사상 처음으로 3월 미국에 수출된 4인승 소형 항공기 ‘반디호’ 개발에 영향을 미쳤다. ‘반디호’ 제작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항공우주연구원 안석민 박사는 “보라호 사고가 난 뒤 기체 구조실험을 할 때 안전 계수를 높이는 등 설계를 보완하고, 비행 중 발생하는 진동 테스트를 강화했다. 시험비행을 할 때마다 20명의 전문가가 안전 절차를 점검했다’”고 말했다.

고성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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