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조문이 웬말인가(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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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최근 우리사회에는 김일성의 죽음을 놓고 김일성과 북한정권에 대한 의식이나 개념에 혼란 또는 착각을 일으키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김일성이 죽기 얼마전 남북정상회담과 미국과의 핵협상재개의 길을 열어 놓았고,그것이 우리와 미국에 호의 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가 평생에 걸쳐 저지른 전쟁·숙청·테러·탄압과 수많은 인간유린을 덮거나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김일성은 막판에 대화에 합의한 것 뿐이지 김일성 아닌 다른 사람이 된게 아니다.우리 민족에 역사상 유례없는 재앙과 시 련을 안겨준 장본인이라는 사실에는 달라진게 없다.
그런 김일성이 죽었다고 야당에서 조문사절단을 보내자는 주장이 나오는 것은 기가 찰 일이 아닐 수 없다.조문이 뭔가.죽음에 대한 슬픔의 표시가 조문이고,슬프자면 최소한의 우의나 인간적 관계가 전제돼야 한다.우리와 김일성간에 그런 조그마한 우의나 인간적 관계가 있었던가.관계라면 전쟁을 일으켜 수백만 동족을 죽고,헐벗고,굶주리게 한 잊지 못할 적의 관계가 있고 아웅산 테러·KAL기 폭파의 원한쌓인 관계가 있을 뿐이다.
우리가 김일성과 북한정권을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고 만나면 정중한 언사를 쓰지만,한편으로 2백만의 중무장한 병력이 대치하고 간첩과 지하조직·대남비방·선동방송에 맞서는 가렬하고 냉혹한 대결의 현실도 있음을 항상 잊어서는 안된다.대화를 할 때도 우리가 그들을 존경하거나 인간적인 평가를 하기 때문에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천만부당한 일이다.그런데도 죽기 얼마전에 대화의 물꼬를 열었다고 김일성의 죽음을 조문하자는 것은 목전의 대화만 생각할 뿐 남북관계의 본질이나 김 의 실체를 망각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조문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김을 존경해서인가,그를 인간적으로 평가해서인가.존경도 않고 인간적 평가도 안하면서 조문을 하자는 것인가.
물론 이부영·임채정·남궁진의원등 야당의원들의 조문발상에는 북의 새정권에 대해 우리의 대화·공존의지를 과시함으로써 남북관계를 빨리 호전시키자는 전술적 의도가 있음을 안다.그러나 조문외교도 정상적인 국교관계와 일반적 외교의전이 통용되는 나라간에 하는 것이다.우리 보다 훨씬 개방적이고 동양적 윤리감정이 적은미국에서도 클린턴 대통령의 애도발언을 놓고 상원의 중진의원이 잇따라 비판을 하고 나섰다.전쟁세대가 아직 시퍼렇게 눈을 뜨고있고,전쟁부상자와 이산가족의 고통 이 계속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조문사절이라니 국민감정상 용납이나 될 소리인가.
아무리 전술차원이라고 해도 남북관계의 본질과 실체를 왜곡·혼란시키는 발언은 삼가야 마땅하다.우리는 국민의식에,특히 자라나는 세대의 의식에 악영향을 미칠 이런 발언의 자제를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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