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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진홍의소프트파워

파격의 만남 파격의 대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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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올해 일흔두 살의 오자와 세이지(小澤征爾)는 일본이 낳은 세계적인 지휘자다. 태어난 곳은 중국 선양(瀋陽)이지만 일본 명문 도호(桐朋)음악학교를 거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을 사사했다. 그 후 1973년 38세의 나이에 미국 5대 오케스트라의 하나인 보스턴 심포니의 음악감독을 맡아 30년간 재임한 바 있는 관록의 마에스트로다. 현재도 빈 슈타츠오퍼 음악감독으로 활약하고 있다.

그런데 바로 그 오자와를 한눈에 알아보고 그에게 평양교향악단의 지휘를 맡기고자 했던 사람이 있다. 다름 아닌 김정일 국방위원장이다. 김 위원장은 오자와의 공연 실황을 담은 DVD를 보고 그 즉시 지병으로 일본 도쿄에서 요양 중이던 오자와에게 조총련 관계자를 보냈다. 지난해 5월께 일이다. 그리고 “당신의 지휘에 감동받았다. 꼭 평양교향악단의 지휘자로 모시고 싶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하지만 결과는 불발이었다.

오자와는 “2009년까지 오스트리아 빈 슈타츠오퍼 음악감독으로 계약돼 있다”는 이유로 김 위원장의 제의를 정중히 거절했다. 그러자 김 위원장은 “빈과 평양 양쪽에서 다 일해도 상관없다”며 거듭 초빙의 뜻을 전했다. 그러나 오자와는 “북한은 음악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되지 못하는 것 같다”며 다시 한번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거절의 뜻을 표했다.

대체 김 위원장은 오자와의 어떤 면에 그토록 끌렸던 것일까? 얼마 전 추석 연휴 직전에 오자와의 내한 공연무대를 접할 기회가 있었다. 세 시간 넘게 계속된 공연에서 음악 자체보다 그가 무대 위에서 펼치는 몸짓과 표정에 더 눈길이 갔다. 연미복을 갖춰 입긴 했지만 그는 틀에 갇혀 있지 않았다. 그에겐 악보도 지휘봉도 올라설 지휘대조차 없었다. 그가 지휘하는 모습은 흡사 일본의 마쓰리(지역 전통축제)에서 촌로들이 흥에 겨워 춤추는 것 같았다.

그날 공연은 통상적인 오페라가 아니라 무대 장치 없이 성악가들이 오케스트라와 함께 무대 위에서 노래만으로 극의 흐름을 이어가는 ‘오페라 콘체르탄테’였다. 오자와는 지휘 중에도 흥에 겨워 때로는 슬쩍 오페라 가수들 사이로 끼어들어 고개를 끄덕이고 눈짓을 보내는 등 파격적인 행동으로 공연의 재미를 더했다. 그에게는 격식의 틀이 무의미했다. 하지만 그에겐 그 파격이 훨씬 더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는 세 시간 이상 계속된 공연 사이사이에 간혹 엿보이는 고령의 흔적마저도 파격의 신선함으로 날려버릴 줄 아는 말 그대로 마에스트로였다. 결국 김 위원장이 매료됐던 것도 바로 그 오자와의 녹슬지 않은 파격이었으리라.

이번 남북 정상회담 역시 한마디로 파격 대 파격의 만남이었다. 김 위원장의 파격은 이미 만천하에 알려진 바이고, 노무현 대통령의 파격 역시 만만치 않음을 온 국민이 몸으로 안다. 하지만 역시 파격의 단수로는 김 위원장이 한 수 위였다. 노 대통령이 당황할 만큼 말이다. 느닷없이 회담 일정을 연장하자는 제안은 그중 압권이었다. 파격의 노 대통령이 상대적으로 안정감 있는 사람처럼 보인 것도 상대가 워낙 더 큰 파격이라 그랬을 것이다.

북한은 김 위원장의 파격에 맞춰진 나라다. 김 위원장이 어느 곳으로 공을 차도 달려가게 되어 있는 나라가 북한이다. 하지만 우리는 다르다. 가장 분명한 현실은 노 대통령이 얼마 안 있어 지금 그 자리를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두 파격이 네 시간 남짓 얼굴을 맞댄 결과 만들어낸 남북 정상 간 선언문에 포함된 각종 경제협력 사업을 실제 실행하는 데 소요될 최소 50조원 이상의 막대한 돈은 고스란히 국민 부담으로 남는다. 2박3일간의 두 파격의 무대를 구경만 한 대가 치고는 청구서가 너무 센 것 아닌가 싶다.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