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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영화광 안으론 美영화팬 밖으론 主體강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5면

영화광으로 알려진 金正日은 그의 거처에 1천편 혹은 수천편에가까운 영화필름을 소장하고 최신식 시설을 갖춘 시사실에서 밤늦은 시간까지 영화감상을 즐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정일은 1973년 그의 이름으로『영화예술론』(국내엔 영화평론가 李孝仁씨가 89년 친구출판사刊『북한영화의 이해』에서 일부를 소개)을 낼만큼 영화에 대해 열정을 가지고 있으며 지난 20여년 이상 그의 영화관은 북한의 영화제작 현장에 반영돼왔다.
초보적인 것이긴 하지만 그의『영화예술론』은 북한 영화이론의 교과서로 통용되고 있다.
그러나 김정일의 映畵觀은 개인적 취향과 대외적 정책에 있어서는 이중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78년부터 86년까지 북한에 체류했던 申相玉감독과 崔銀姬씨 부부는『그는 사저에서는 할리우드영화를 비롯한 흥행영화를 즐겨보면서도 밖에서는「공 산주의의 새인간형으로 인민을 교화시키는데 영화가 헌신해야 한다」는등 영화를 주체사상의 도구로 생각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김정일은 지금까지 3백50여차례의「현지지도」를 통해 영화제작의 세세한 것까지 관여해 온 것으로 알려진다.1972년 체코의카를로바리영화제에서 특등상을 받은『꽃파는 처녀』도 김정일이 제작현장에 깊숙이 참여한 작품이라는 것이 북한의 선전에 의해 밝혀지고 있다.
일제시대를 무대로 머슴이 지주의 학대를 극복하고 사회주의 건설로 나선다는 주제를 담고 있는 이 영화는 북한이『피바다』와 함께 영화는 물론 가극.소설등의 형태로 사회주의 예술의 금자탑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작품이다.김정일은『꽃파는 처 녀』에서 꽂분이역으로 나온 홍영희의 연기방식까지 자세히 지시했으며,그의 타고난 영화적 재질이 이 영화를 걸작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북한영화계엔 널리 퍼져 있다.
북한이 자랑하는 평양교외의 1백만평이 넘는「조선예술영화촬영소」와 1만5천편이상의 영화필름을 보관중이라는「영화문헌고」도 최고위층의「영화에 대한 특별한 안목과 은혜」로 설립될 수 있었다고 북한 영화인들은 믿고 있다.
1977년2월 김정일이 후계자로 지목되는 데는 영화.연극.음악등 예술의 다방면에 걸친 조예도 한몫했다는 말이 있다.
소년시절부터 영화에 심취하기 시작한 김정일은 김일성대학 졸업후 黨의 선전선동부장으로 있으면서 김일성과 빨치산원로들이 모인자리에서『피바다』등 김일성우상화 영화와 가극을 제작해 그들을 흡족케 했으며 재주와 충성심을 인정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申相玉.崔銀姬씨 부부와 방북했던 교포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김정일은 가까운 영화인들을 자신의 시사실로 불러 영화감상을 즐기고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길 좋아한다고 한다.
이런 자리에서 김정일은『영화를 보면 골치아픈 것이 사라진다』고 자주 말한다는 것.그는 최신 경향의 외국영화들에 대해 묻고열심히 경청한다고 한다.
〈李揆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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