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걷기전문가 뚜버기의 주관적이고도 사소한 이야기 ②

중앙일보

입력

나도 차 있단 말이야!


‘뚜버기(or 뚜벅이)’라고 하면 ‘뚜벅뚜벅 걸어 다니는 사람’이란 직접적인 뜻 외에 ‘차가 없어서 당연히 걸어 다닐 수밖에 없는 빈(貧)한 사람’이라는 뜻도 내포하고 있다. 스스로 걷기를 선택했다기보다는 뭔가 부족한 상태를 어쩔 수 없어서 거리로 내몰린 불쌍한 존재.
하지만 정말 그럴까? 적어도 걷기 전문가인 필자의 눈에는 그렇지 않다. 필자도 차를 가지고 있다. 그것도 중형! 그러나 당당하게 뚜버기를 선택했다. 그러니, 측은지심의 눈을 거두고 일단 ‘자발적 뚜버기’의 뿌듯한 이야기를 들어보라.

자발적 뚜버기들은 일명 ‘BMW’를 애용한다. 버스(Bus), 지하철(Metro), 걷기(Walking). 이들이야 말로 자가용을 탔을 때 느끼는 안락함 이상의 것을 준다.

버스를 타고 흔들흔들 하며 창밖의 풍경을 감상해 본적이 있는가? 버스의 창(窓)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리얼 다큐멘터리 화면이다. 비개인 오후,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질 때의 버스여행에는 호화 크루즈 여행과도 바꾸기 싫은 낭만이 있다. 이런 날 지하철을 타는 것은 풍경과 세상에 대한 몰상식 행위다. 차가 좀(?) 막혀서 몇 시간이 걸릴 것 같으면 차라리 걸어서 가라!
꽉 막힌 도로에서 버스 전용차선으로 쌩쌩 달릴 땐 그 비싼 포르쉐라도 대적할 수 없다. 게다가 길이 조금 막히면 조금 쉬는 셈 치고 졸면 되지. 왜 운전하느라 신경 쓰면서 다리에 쥐가 나도록 페달을 밟고 있는가? 버스는 가장 저렴한 여행수단이자 인간세상을 구경하는 특별한 사파리다.

한때 조그마한 자가용이라도 갖고 싶어 했던 건 시원한 에어컨과 따스한 히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요즘의 버스는 다르다. 두꺼운 옷을 준비해야 할 만큼 빵빵한 에어컨 바람이 쉼 없이 나온다. 혹자는 너무 센 에어컨 바람 때문에 버스와 지하철 타는 게 두렵다니 세상 참 많이 달라졌다.

지하철은 신화의 세계로 가는 길이다. 한없이 낮은 땅 속으로 내려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은근 스릴 있다. 서로 마주보게 만들어진 의자에 앉아 지하세계를 같이 탐방하는 상대방을 관찰할 때는 묘한 동지의식도 느낀다. 지하철에서 내려 다시 계단을 오를 때는 그리스 신화의 한 장면을 패러디해 본다. 하데스가 지배하는 지하세계를 한바탕 휘젓고 헤라클레스라도 된 양 출구를 벗어날 때면 나는 절로 어깨가 쭉 펴진다. ‘개찰구는 레테의 강이다’라고 생각하면 너무 오버하는 것 같지만 그런들 어떠랴? 개찰구를 통과하면서 집에서, 회사에서 있었던 시큼털털한 기억들을 죄다 털어버릴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좋지 아니한가? 다시 지상으로 올라갈 수 있는 출구를 찾았을 때의 발걸음은 또 얼마나 가벼운가? 삯을 지불하지 않아도 지상까지 편하게 옮겨주는 ‘에스컬레이터’라는 녀석도 종종 만날 수 있으니 주차할 곳 찾아 헤매는 자가용과 비할 바가 아니다.

물론 BMW의 대미는 역시 ‘걷기’다. 튼튼한 두 다리가 있어 땅을 밟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뛸 만큼 흥분된다. 흙길의 부드러움은 없어도 단단한 땅에 두발을 곧게 세우고 지구의 기울기 때문에 혹시 내가 삐딱한 건 아닌지 상상해 보는 일도 즐겁다. 우리는 북위 40도 근처니 저기 잘 빼 입은 양복쟁이 아저씨도, 위태 위태 하이힐 신은 아가씨도, 곧게 서 있는 경비병도 사실 약간 삐딱한 거네? 걸으면 건강해지고 다이어트에도 좋다는 손익계산서를 생각하기보다는 역시 이런 엉뚱한 생각이 걷기에는 더 어울린다.

차란 놈은 한번 굴릴라 치면 솔직히 감당해야 할 비용이 너무 많다. 뭐 그럴 수도 있다, 생각되는 정도면 눈감아주겠지만 여기저기서 도둑놈 심보를 보이니! 큰돈 들여서 한번 구입했으면 됐지, 이 녀석 한 달 밥값(기름 값)은 내 밥값보다 더 들어가는 것 같다. 그나마 싼 것을 먹는 차라 해도 그 비용이 만만치 않다. 또 없는 돈에 밥 먹여주면 됐지, 차란 녀석은 발칙하게도 아프기까지 하다. 우리 딸아이 병원비만큼이나 덥썩 덥썩 수리비를 먹어댄다. 게다가 보험료도 내야 한다. 무슨 보험료는 또 그리 많이 드는지. 이러면 끝일까? 시민의 호주머니를 터는 데 일가견이 있는 정부에서도 ‘차를 가지려면 세금을 내라’ 한다. 이쯤 되면 ‘차 = 돈 먹는 하마 녀석’이다.

그러니 자발적 뚜버기는 하마를 몰고 다니는 사람을 부러워할 필요도, 빵빵거리는 수입 외제차에 주눅들 필요도 없다. 단지, 어깨를 펴고 걸을 때 혹시 부딪힐지 모르는 상대방의 어깨만 주의하면 된다. 이 얼마나 심플하고 즐거운 인생인가!

뚜버기 프리랜서

※ ‘걷기전문가’임을 자처하는 필자는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다’는 신념으로 멀쩡한 본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온-오프 칼럼니스트로서의 생활을 포기하지 않는 인터넷시대의 소시민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