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 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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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써니가 우리집으로 전화를 걸어서 나를 찾은 건 수요일 밤 열한 시쯤이었다.써니는 혹시 토요일 밤에 자기 집으로 와줄 수 있느냐고 내게 물었다.
『나 학원 끝나고 그러면 여덟 신데….』 나는 일부러 내게 전화를 건네준 어머니가 들으라고 큰 소리로 대답했다.
『알았어.그럼 저녁은 먹고 오겠네.기다릴게.잘자,멍달수.』 전화를 끊고 다시 침대에 누웠는데 알 수 없는 일이었다.써니는절두산 성당의 뜰에서 헤어진 뒤로 한동안 연락이 없었다.그때 써니는 참자고 말했었다.키스하고 싶은 것도 참고 늘 보고 싶은것도 참고,대학에 들어갈 때까지는 무조건 참 고 지내자고 그랬었다.그리고 공부하기가 좋건 싫건 하여간 좋은 대학교에 꼭 들어가야 한다는 거였다.좋은 대학에만 들어가면 모든 게 한꺼번에다 주어진다는 게 써니가 말하는 요지였다.
좀 쪽 팔리는 이야기이기는 하지만,나는 써니에게는 아주 말 잘 듣는 착한 아이처럼 굴고 싶었다.그래서 사실 나도 새롭게 마음을 다져먹고 수학 학원에도 등록하고 그런 거였다.
토요일,체육시간에 못돼먹은 경희를 징벌하고 난 토요일,나는 악동들의 유혹도 뿌리치고 학원에 가서 수학을 들었다.써니를 만나는데 당당하기 위해서였다.서교동 써니네 집의 초인종을 눌렀을때에는 날이 거의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들어와.기다리고 있었어.』 인터폰에서 써니의 소리가 들리고쇠대문이 덜컹 열렸다.나는 안으로 들어서서 다시 쇠대문을 덜컹닫아 걸었다.마당 한 쪽에서 큰 불독이 나를 향해 으르렁거렸다.불독은 다행히 쇠우리 안에 갇혀 있었다.밖에서 보기 보다 훨씬 넓은 뜰이 었고 잔디밭의 구석진 곳곳에 무슨 조각같은 것들이 잘 배치돼 있었다.현관으로 가는 돌계단을 오르는데 현관문이열리고 써니가 나타났다.
써니는 딴 여자 같았다.반바지에 반팔 티셔츠만 입고 있었고,머리는 다 풀어서 무슨 샴푸 선전에 나오는 여자처럼 생머리를 늘어뜨린 모습이었다.분명한 건 세상에 써니보다 더 예쁜 여자란건 없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내가 갑자기 전화해서 놀랐을 거야.그치 멍달수씨.』 『무슨일이 있는 거야?』 『그래.니가 너무 보고 싶었는데…이건 충분히 「무슨 일」이지 뭐.잠깐 여기 앉아.커피줄까.』 거실의 소파에 나를 앉아 있게 하고,써니가 커피잔을 양손에 하나씩 들고나타나서 「내 방으로 가지 뭐」라고 했다.
『집에 아무도 안계신가봐 그치.』 계단을 오르면서 내가 그랬다.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약간 켕기고 있었다.써니가 말없이 살짝 웃었다.뭔가 속이 깊은 웃음이었다.
이층 복도 끝쪽이 써니 방이었다.우리가 들어서고 써니가 방문을 닫았다.나는 써니가 눈으로 가리키는대로 책상에 딸린 나무걸상에 앉았고 써니는 자기 침대 위에 걸터 앉았다.나는 써니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꿀꺽 마른 침을 삼켰다.
『너무 긴장하지 마.너답지 않아.』 써니가 말하고는 커피잔을들어 한모금을 삼켰다.
그렇지만 난 사실 결코 의연하게 견딜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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