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 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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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정학이 끝나고 다시 교실로 돌아가 다른 아이들과 섞였을 때는어쩐지 여러가지로 서먹서먹하였다.마치 학기 중간에 새로 편입해온 아이가 아이들 틈에 꿔온 보릿자루처럼 혼자 앉아 있어야 하는 것처럼.
게다가 어떤 아이들은 부러 우리에게 악살을 먹이느라고 내놓고면전에서 무안을 주고는 하였다.특히 경희같은 계집애들은 생전에나하고 무슨 원수를 지었는지 걸핏하면 싸우자고 들었다.예를 들면 이런 거였다.점심시간에 매점 근처에 앉아 있는데 하영이하고경희가 내 앞을 지나가길래「잘 지내니」하고 내가 한마디를 던진적이 있었다.물론 하영이에게였다.기껏해야 그냥 못들은 척하고 지나가버려도 그만인 일이었다.그런데 몇발짝을 가다가 경희라는 계집애가 내 앞으로 되돌아와서 쏘는 거였다.
『얘 멍달수.우린 너같은 애가 말 붙이는 거 아주 기분 나쁘단 말이야.그러니까 앞으로는 절대로 아는 척하지 마.넌 불결한애구….우리한테두 병균이 옮을 것 같단 말이야.』 하여간 말도안되는 소리를 하면서 잘난 척을 하는 거였다.
그러다가 한번은 포크댄스를 배우는 체육시간이었다.음악에 맞춰서 돌기도 하다가 펄쩍 뛰기도 하다가 체인징 파트너라는 걸 하는 거였다.한 음악이 나오는 동안에 몇명인가의 파트너가 바뀌고는 했다.경희가 내 앞으로 와서 내 파트너가 됐을 때 나는 그야말로 찬스가 내 앞에 왔다고 생각했다.
경희는 단연코 우리 학년에서 가장 무거운 계집애였다.아마 60킬로그램은 충분히 넘을 거였다.나는 경희가 살을 빼기 위해서아주 열심히 수영장에 다닌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우리 악동들은밖에서 경희를 보거나 하면 근처의 전신주같은 걸 부둥켜안고 있는 시늉을 해서 경희를 놀려먹고는 했었다.경희가 걸어가면 땅이흔들린다는 제스처였다.
하여간 그런 경희가 내 파트너가 된 거였다.이제 몇번인가 서로 손을 잡고 펄쩍펄쩍 뛰다가 체인징 파트너를 해야 할 거였다.경희는 내 손을 잡는 것이 무척이나 언짢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손을 잡고 있다기 보다 손을 서로 살짝 접촉시키고 있었다고 하는 게 옳았다.
하여간 내가 경희의 허리를 잡고 번쩍 들어 올려서 옆에 선 녀석에게 파트너를 넘겨주는 대목이었다.나는 경희의 허리에 살짝손을 대고 힘은 하나도 쓰지 않았다.
경희는 발레리나처럼 양쪽 발끝을 들고 잔뜩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그런다고 혼자 하늘로 뜰 수는 없었다.내가 번쩍 손을 들었다.젊은 여선생님이 달려와서 내게 물었다.
『왜 그래.여기 뭐가 잘못됐니.』 『글쎄 얘가 너무 무거워서요…난 도저히 못들겠는데요.』 그러자 거구의 내 파트너가 갑자기 뒤뚱뒤뚱 체육관 구석으로 달려가더니 매트리스에 엎어져서 엉엉 울었다.
그날은 5월의 두번째 토요일이었다.내가 그날을 아직도 자세히기억하고 있는 건,바로 그날 저녁에 나는 평생동안 잊을 수 없는 엄청난 일을 경험했기 때문이다.그 일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거였다.
그날 써니는 하나도 참지 않고 내게 키스했고 나는 어리둥절한상태에서 써니를 내 여자로 받아들였다.경희의 말대로 한다면 아주 불결한 짓을 치른 거였다.그날 써니와 헤어져 집에 돌아와서누웠을 때,나는 진짜로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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