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in뉴스] ‘뭉치면 죽고 배신하면 산다’ 기업들 ‘리니언시’ 냉가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경제 02면

지난달 공정거래위원회에서는 이례적인 전원회의 결정이 있었습니다. 각종 보험료율을 담합해 과징금을 부과받은 10개 손해보험사 가운데 3개 보험사에 대해 과징금을 깎아 준 것이었죠. 담합을 자진 신고한 기업에 처벌을 감면해 주는 ‘자진 신고자 감면제(리니언시·Leniency)’에 따른 것입니다.

담합을 1순위로 자진 신고한 A사는 과징금 109억원 전부를 감면받았고, 2·3순위로 신고한 B사와 C사도 과징금을 30~50% 덜 내게 됐습니다. 이로 인해 올 6월 적발 당시 526억원에 달하던 손보사 담합 관련 과징금 총액은 406억원으로 20% 가까이 줄게 됐습니다. 해당 손보사들은 업계에선 의리(?)를 저버린 배신자가 됐지만 거액의 과징금을 내지 않아 이득을 챙긴 셈입니다.

리니언시는 ‘제재 감면’이라는 ‘당근’을 줘서 기업들의 자수를 유도하게 하는 제도입니다. 불공정행위에 대한 조사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마련됐으며, 미국·유럽 등 선진국에서도 일반화됐습니다.

공정위 관계자는 “담합은 구체적인 증거물이 확보되지 않으면 이를 증명하기 쉽지 않다”며 “이 때문에 증거물을 제시하는 자진 신고자에 대해서는 각종 혜택을 늘려가는 게 국제적 추세”라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배신자 때문에 답합이 깨진 손보업계의 분위기는 싸늘합니다. 그간 손보업계는 “관행과 (금융 당국의) 행정지도에 따른 것으로 담합이 아니다”고 주장하며 정부와 소비자 설득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A사의 자진 신고는 이런 업계의 주장과 노력을 일거에 무용지물로 만든 것이지요.

이들은 소비자들에게서 쏟아지는 비난에 냉가슴을 앓고 있지만 A사 등에는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뜨리고 있습니다. 최근 열린 손보사 대표 골프모임에서 A, B사 대표가 참석한다는 소식에 다른 손보사 대표들이 참석을 보이콧하기도 했지요. 다른 업계에까지 “뭉치면 죽고, 배신하면 산다”는 자조적인 말이 돌 정도로 파장은 적지 않았습니다.

일각에서는 담합으로 가장 많은 이익을 얻은 회사가 리니언시로 과징금을 면제받는 경우까지 있다며 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합니다. 담합은 일종의 범죄인데, 그 범죄의 주도자까지 ‘자수’라는 이름으로 완전히 면책해 주는 것은 곤란하다는 겁니다. 공정위는 이런 지적을 받아들여 다음달부터 담합을 주도한 사업자는 자진 신고하더라도 과징금을 내게끔 관련 법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손해용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