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 가수가 말 많다고? 난 할 말은 할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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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딕시 칙스:셧업 앤 싱’은 3인조 가수가 호된 시련을 딛고 나아가는 모습을 그린 음악 다큐멘터리이자 언론자유의 본질, 더 구체적으로 옮기자면 자신의 생각을 말할 자유의 본질을 묻는 문제작이다. 노래하는 가수에게 말하는 자유? 어쩌면 이게 핵심이다. 이 자유를 최전선에서 지키는 게 본업인 사람만 누려야 하는 자유가 아니라는 얘기다. 주제가 너무 거창하게 들렸다면, 다시 소개한다. 그 주제를 호소력 있는 음악을 곁들여 꽤나 유쾌하게 소화한 다큐다.

딕시 칙시는 미국의 3인조 여성그룹. 음반판매량이 무려 3000만 장에 달하는 엄청난 인기 가수다. 이들은 영국 런던 공연 도중 한 멤버가 무대에서 한 말 때문에 설화(舌禍)에 휩싸인다. 리드 보컬 나탈리 메인즈가 부시 대통령을 가리켜 자신과 같은 텍사스 출신인 게 부끄럽다고 한 것. 다른 멤버들은 가십성 해프닝쯤으로 가볍게 여겼지만, 이 말이 미국에 전해지자 애국심을 내세운 우파들이 맹비난을 퍼붓는다. 때는 2003년 3월. 미국의 이라크 공격 직전이자 부시 대통령의 지지율이 높았던 시절이다.

사실 이들은 이렇다 할 정치색이 있는 것도, 저항정신과 일탈을 내세우는 록밴드도 아니다. 보수적인 백인이 즐겨 듣는 컨트리 가수인 것이 더 큰 반발을 불러왔다. 음반이 무더기로 트랙터에 짓밟혀지고, 미국 내 공연장 앞에서는 반대시위가 벌어지고, ‘배신자’ ‘창녀’ 같은 험한 말과 살해 위협까지 전해진다. 전국 각지의 컨트리 음악 방송국은 청취자의 항의가 두려워 이들의 음악을 아예 틀지 않는다. 부시 대통령도 딕시 칙시를 은근히 야유하는 뉴스 화면을 통해 영화에 조연급으로 등장한다. 음반 판매는 급락한다. 가수 생명이 끝날지도 모르는 위기다. 영화의 원제이자 팬들이 퍼부은 비난대로, ‘입 닥치고 노래나 하는 것(Shut Up and Sing)’이 상책일까.

눈에 띄는 것은 이 다큐가 세 멤버를 여론에 난타당한 불쌍한 연예인이나, 운 나쁘게 설화에 휘말린 딱한 처지로 결코 묘사하지 않는 점이다. 사태의 추이를 시간 순으로 따라가는 대신, 카메라는 살벌한 상황에서 빠져나와 무대 안팎에서 벌어지는 유쾌한 일상을 포착한다. 그렇게 조금씩 드러나는 세 여자의 모습은 저마다 남편과 아이를 둔 생활인이고, 그들의 가치관은 여느 미국인과 다름없다. 신기루 같은 스타덤에만 기대는 나약한 존재도, 그렇다고 ‘화씨 911’의 영화감독 마이클 무어처럼 노골적으로 부시를 비난하는 인물도 아니다.

특히 발언의 당사자이자 멤버 중 가장 어리고 당찬 나탈리는 속된 말로 맷집이 좋아 보인다. 자신이 못할 말을 한 게 아니란 점을 곳곳에서 상기시킨다. 자칫 멤버 간에 불화가 빚어질 법도 하지만, 세 여자는 일종의 자매애로 뭉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음악 다큐의 재미도 따라온다. 이들의 가창력은 컨트리 음악에 낯선 관객마저 매력을 느낄 법하다.

영화에 담긴 시간은 이들이 다시 새 음반을 내는 2006년까지다. 주요 홍보 수단인 컨트리 음악 방송국의 도움 없이 성공할 수 있을까. 순회공연 티켓은 제대로 팔릴까. 조바심 속에 이들은 예전과 다름없이 대형 공연장을 무대로 고집한다. 심지어 그동안 자신들이 들은 비난을 몸에 쓴 도발적인 모습으로 잡지 표지에 등장한다. 이들이 겪은 시련과 그 당당한 모습은 ‘말할 자유’가 극도로 위축된 시대상에 대한 기록이자, 역설적으로 그 자유에 대한 강한 신념을 보여준다.

물론 그동안 달라진 것도 있다. 이라크전의 명분이었던 대량살상무기는 발견되지 않았고, 부시 대통령의 지지율은 역전됐다. 영화에 나오지 않는 사족을 더하자면, 이들은 올 2월 그래미 시상식에서 5개 부문 트로피를 거머쥐며 화려하게 주인공으로 등극했다. 신곡의 제목 역시 만만치 않다. ‘화해할 생각 없어(Not Ready to Make Nice)’. 노랫말에는 자신들이 겪은 일에 대한 솔직한 심경이 담겼다. 4일 스폰지하우스 압구정점·중앙시네마점 개봉.

주목! 이 장면

영화의 마지막. 딕시 칙스는 3년 전 문제의 발언이 나왔던 바로 그 무대, 런던의 공연장에 선다. 그때나 지금이나 미리 준비한 말은 아니라지만, 나탈리는 통쾌하고 신랄한 한마디를 던진다. 마치 “입 닥치고 노래나 하라고? 싫다면 어쩔래? 난 말할 자유가 있어!”라는 듯한 태도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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