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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소재로 그린 추상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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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명상, 2006, 213×213cm, 린넨에 오일.


추상은 추상이되 내용과 맥락이 있다. 1995년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회고전을 가졌던 미국 추상화가 로스 블레크너(Ross Bleckner·58)가 국내 첫 개인전을 연다.

서울 청담동 카이스 갤러리는 4일부터 블레크너의 신작 ‘명상’ 시리즈 11점을 선보인다. 작가는 지난해부터 꽃을 소재로 추상화를 그리고 ‘명상’이라고 이름붙였다. 2m가 넘는 정사각 화면 전체에 강렬한 원색과 어두운 색을 대비시켜 꽃의 이미지를 흩뿌린 듯 그렸다.

 흔히 추상화 앞에서 “무엇을 그렸는가”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치부된다. 대부분 제목도 없다. 번호를 매겨놓거나, ‘무제’라고 이름 아닌 이름을 붙인다. 작가가 그린 이미지를 소재나 제목이라는 틀에 가두지 말고 순수한 형태로 감상하라는 뜻이다.

 모더니즘의 추상회화는 이처럼 형식적 탐구에 몰두하다가 벽에 걸린 장식품으로 전락했다는 반발이 나왔다. 80년대부터 인기를 누린 블레크너는 이 지점에 서 있다. 그는 세포, 꽃 등 보이는 것을 소재로 추상화를 그렸다.

 꽃을 꽃답게 그리면 구상이 되지만 블레크너의 그림은 꽃잎 모티브를 화면에 형식적으로 배열했다. 추상 회화답게 화면에는 시작도 끝도 없다. 꽃잎 이미지가 일관되게 대형 화면을 채우며 퍼져나간다. 블레크너는 이를 통해 보는 이에게 꽃에서 연상되는 아름다움의 덧없음, 인생의 허무함, 사랑의 상실 같은 메시지를 전한다.

 작업실에 마네의 꽃그림 복제품을 걸어두고 있는 그는 “이 그림이 내 모델”이라고 말한다. “아름다움이란 가벼움, 빛, 투명함, 질량, 형태, 표면, 색채다. 이 모든 것은 감정적·형태적·정신적으로 작용한다”는 얘기다. 꽃 모티브를 추상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에 대한 설명인 셈이다.

 49년 뉴욕에서 태어난 블레크너는 73년 캘리포니아 아트 인스티튜트를 졸업하고 79년 뉴욕 메리 분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며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전시는 11월 9일까지. 02-511-0668 

권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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