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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워라 ‘술 익는 마을’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9호 27면

“대학 2학년 때인 것 같아요. 쌀농사가 몇 년째 풍작이라고 막걸리를 쌀로 빚을 수 있게 한동안 허용한 적이 있었죠. 마신 뒤에 냄새는 물론이고 숙취가 심했던 밀 전분으로 만든 막걸리만 마시다가 쌀막걸리가 나온다고 하니 밤새 기다리다 판매 첫날 가게로 달려갔었죠.”

김태경.정한진의 음식수다

“단골에게만 몰래 주던 밀주(密酒)를 마실 수 있다는 것도 자랑거리이던 시절이 있었지.”

“학교 근처 주점 주인아주머니에게 딸이 있었는데 드나들던 학생 가운데 몇을 예비 사위라고 부르며 특별히 집에서 담근 막걸리를 대접했었죠. 저도 거기에 끼어보려고 노력했지만 아쉽게도 기회가 없었죠.”

“언제나 식량자급이라는 문제가 우선이었으니 쌀로 술을 빚는다는 것이 호사였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결국에는 그 많던 전통주가 사라져 버렸잖아.”

1965년 ‘양곡관리법’에 의해 쌀을 재료로 한 양조를 전면 금지하기 오래전부터 우리의 전통주는 수난을 받아왔다. 조선시대 말에는 문헌에 등장하지 않는 민가에서 빚는 술까지 포함해 650여 종의 전통주가 있었고, 일제가 1916년 ‘주세령’을 시행하면서 조사한 통계를 보더라도 당시 12만 개 이상의 양조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같은 시기에 일제는 판매용이 아니라 집에서 소비하는 술에 대해 ‘자가용 면허’를 1916년부터 일시적으로 허용했는데 37만여 개가 발급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과도한 주세 부과와 밀조주의 단속으로 우리의 술 전통은 명맥을 유지하기 어렵게 된다.

“예전에는 집집마다 빚어서 마시던 가양주(家釀酒)가 있었잖아. 술을 빚어 손님을 대접하기도 하고 차례나 제사 때 제주로 썼지. 일제시대 이전에는 일곱 집에 한 집꼴로 술을 빚어 마셨다고 하니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의 정경을 떠올려볼 수 있지 않겠어.”

“그 아름다운 정경을 그려볼 수 없을 정도로 80년 중반에는 30여 종밖에 남지 않았죠. 게다가 술 빚는 법의 정통성을 잃은 채 일본식 술빚기와 획일적인 개량주의 양조법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죠.”

“한 나라의 술은 그 민족의 식습관을 반영한다고 하잖아. 우리의 경우에는 쌀로 빚는 술이 대부분이지만 찹쌀·보리·밀·조·수수·옥수수 등도 이용되지. 재료에 따라 술맛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지만, 똑같은 재료라 하더라도 술 빚는 방법에 따라 맛과 향이 천차만별이야.”

“술 빚을 때 이용되는 누룩에 따라서도 달라지죠. 밀누룩·보리누룩·쌀누룩·녹두누룩 등 수십 종이 있으니, 이래저래 조합해보면 수없이 많은 술이 가능해요. 또한 술 빚는 시기에 따라, 술 익히는 기간에 따라, 술 거르는 방법에 따라 달라지니 그 맛과 향을 음미하는 재미가 와인보다 더할 수 있겠어요.”

“그렇지. 희석식 소주와 같이 몇 가지로 제한된 술에 익숙해진 우리의 무뎌진 미각을 일깨워주기에 더할 나위 없지. 탁주와 증류식 소주 말고도 밑술을 맑게 거른 청주들이 얼마나 많아.”

“이제는 법이 개정되는 등 여건이 좋아졌으니 전통주 생산이 더욱 활발해져 ‘전통주 소믈리에’라는 직업이 생기지 않을까요.”

집집마다 마을마다 독특한 맛과 향을 지닌 전통주가 많이 개발돼 우리 삶을 즐겁게 해줄 날을 꿈꿔본다.


맛있는 것 먹기를 낙으로 삼는 대학 미학과 선후배 김태경(이론과실천 대표)ㆍ정한진(요리사)씨가 미학(美學) 대신 미식(美食)을 탐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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