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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을살리자>28.인삼-현대과학도 다 못푼 신비의 약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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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우리나라에서 뭐니뭐니 해도 인삼만큼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도 없다.
秦始皇이 기원전220년 徐市(서불)과 童男童女 3천명을 동방에 보내 구하려했다는 것이 바로 산삼인 것으로 알려진 이래로「한국 하면 人蔘,인삼 하면 高麗人蔘」의 등식이 통용돼오고 있다. 이는 우리 인삼이 중국산 三七人參이나 일본산 竹節人參,미국또는 캐나다산 花旗參등 다른나라 것에 비해 월등하게 영험스런 효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조때부터 우리인삼의「삼」字를「參」이 아닌「蔘」으로 쓰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 이들 외국삼들과 玉石의 차별을 두기 위한 자존심의 표시다.
1843년 옛 소련의 식물학자 C A 메이어에 의해 만병통치약을 뜻하는「파낙스 진셍」(Panax Ginseng)으로 학명이 붙여지면서 정식으로 서방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한 우리 인삼의약효는 한동안「동양인의 신앙적 믿음일 뿐」이라고 일축됐었다.
그러나 60년 일본 東京大의 시바다 쇼지(柴田承二)와 다나카오사무(田中治)교수에 의해 암을 비롯,당뇨.동맥경화.고혈압등 각종 난치병에 탁월한 효과가 있음이 속속 입증됨에 따라 「인삼중의 인삼」인 高麗人蔘에 대한 성가도 그만큼 높 아지고 있다.
인삼이 약용으로 쓰인 기록은 중국 前漢 元帝때(기원전 48~33년) 史 游가 쓴 『急就章』에 나타난 것이 처음이며 後漢 軒帝때(196~220)張仲景이 지은 유명한『傷寒論』에는 수록된1백13가지 약처방중 21가지에 인삼이 들어가 있다.
그러나 우리인삼에 대해서는 이보다 3백년정도 늦게 나온 陶弘景(452~536)의『新農本草經』에 처음 등장하는데 「百濟삼은모양이 가늘고 단단하면서도 둥글다.高麗(고구려)삼은 크기는 하나 虛하고 軟해 백제삼에 미치지 못한다」고 적고 있다.
기록상으로는 고려사에 고려인종때(1122)인삼을 처음 재배했다고 돼있으나『신농본초경』같은 중국측 기록은 물론 신라 聖德王23년(723)4월 금.은.果下馬등과 함께 인삼을 당나라에 보냈다는『삼국사기』의 기록등으로 미뤄 이미 삼국시대 에 원시적이나마 지금의 長腦(일명 山養蔘)와 같은 형식의 재배가 시작됐을것으로 보고 있다.
이어 고려에 들어서는 惠宗 원년(944)에 인삼 50근을 後晋에,文宗24년(1070)과 34년(1080)에 각각 인삼1천근씩을 宋에 보냈을 정도로 인삼의 재배가 상당히 보편화돼 徐兢의 『高麗圖經』에 나오는대로 생삼을 쪄 오늘날 紅 蔘과 같은 熟蔘을 만들기 시작했다.
인삼의 재배에는 한여름에도 섭씨35도를 넘지 않으면서 연간 평균기온이 섭씨 0.9~13.8도이고 강우량은 1천1백~1천3백㎜에 눈이 적어야하며 북쪽이나 북동쪽으로 8~15도 가량 비탈진 비옥한 땅이 제격인데 우리나라에는 이같은 적 지가 거의 전국에 걸쳐 있어 일단 재배에 성공한 뒤 제한적이나마 급속히 확산되면서 재배및 보관기술이 개발된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인삼은 許浚의 『동의보감』이나 중국 吳晋의 『吳氏本草經』에서 지적했듯이 잎부터 뿌리까지의 전체모양이 이름에 걸맞게 마치 사람의 손.발.머리등을 닮은 정도가 외국삼에 비해 뚜렷한 특징을 갖고 있다.
이때문에 예부터 인삼에 대해서는 묵은 햇수를「○○살」,씨앗은「인삼딸」로 부르는등 의인화하여 사람대접을 하곤 했다.
우리나라 인삼은 줄기와 뿌리를 연결하는 蘆頭(삼머리)가 굵고튼실하며 몸통을 자를 때 나오는 나이테가 뚜렷하고 겉껍질이 두꺼운데다 인삼 특유의 향기가 짙어 뇌두가 작고 나이테의 구별이어려운 중국.일본삼과 쉽게 구분된다.
대개 본뿌리에 2~5개의 곁뿌리가 나있는데 마치 다리를 꼬고있는 어린애 아랫도리 모양으로 엷은 황백색을 띠고 있다.
또 주름이 깊게 잡혀 그 수에 따라 나이를 따지는 뇌두는 색깔이 검으며 뇌두 밑부분이 어깨를 웅숭그린 것처럼 부풀어오른게특징. 중국삼은 어깨부분이 거의 없고 일본삼도 그저 삐죽한 정도가 고작이다.
우리나라 인삼은 그 재배지역에 따라 개성인삼.금산인삼.강화인삼.풍기인삼등 크게 네가지로 나뉜다.
그러나 토질이나 재배및 가공방법등에 따라 다소 품종 차이가 있을 뿐 지역적으로 토착화되면서 성분상 뚜렷한 구분이 없다는게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인삼은 원래 「주인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할만큼 재배방법이 까다로워 지금도 인삼중 최고로 치는 예닐곱살짜리를 키워내기가 어려운 형편이다.
현재 남한지역 인삼의 대명사격인 금산인삼은 다른 곳에서 나는것 보다 몸통이 가늘고 살이 단단하며 껍질을 벗기고 나면 뽀얀때깔이 일품으로 주로 네살짜리를 캐는데 백삼의 경우 몸통 일부와 뿌리를 둥글게 말아 가공해 曲蔘으로 불린다 .금산인삼은 특히 밀식재배에 다른 곳보다 햇빛을 충분히 받게하고 한여름인 7~8월께 캐는 독특한 재배방법및 수확시기로 인해 그 품질의 우수성을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최근 연구결과 인삼의 유효성분인 사포닌등은 주로 껍질부분에,그리고 여름에 수확한 것일수록 함량이 많은 것으로 밝혀져 금산인삼의 재배법이 극히 과학적임이 입증되고 있다.
***錦山서 80%거래 이 때문에 현재 국내 생산량의 80%(백삼기준)가량이 이곳 인삼시장을 통해 거래되고 있으며 전국 일선 시.군중 유일하게 군청에 인삼계라는 직제를 두고 있을 정도다. 금산인삼과 더불어 남한지역 인삼의 쌍벽을 이루는 풍기인삼도 소백산 기슭의 지형.기후적 조건이 인삼이 자라기에 좋아 조선 英祖때(1725~1776)부터 재배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일설에는 明宗때 학자인 주세붕선생이 풍기군 수로 있을 당시(1541~1545)인삼재배를 장려한데서 비롯됐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밖에 고려 몽고난때 본토에서 피난온 왕실에 의해 전파된 것으로 알려진 강화인삼은 개성인삼과 기후조건및 재배방법.품질등에서 차이가 없어 주로 여섯살짜리 우량품이 산출되면서 70년대초까지 이름을 날렸으나 한번 재배한 땅의 지력을 고 갈시켜 연작이 불가능한 인삼의 특성 탓에 재배면적이 줄어들면서 지금은 9백여 농가가 연간 2백50t정도만을 생산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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