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Story] '낙농 소국'서 '기업 천국'으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1면

“우리 공장의 생산라인이 멈추면 전 세계 당뇨 환자들에게 심각한 재앙이 초래됩니다. 그래서 모든 시설이 24시간 돌아갈 수 있게 자동화된 것은 물론 웬만한 지진에도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됐죠.”
세계 당뇨병 치료제 시장의 50%를 차지하고 있는 덴마크 제약회사 ‘노보 노디스크’. 20일 오후 덴마크 힐레뢰드의 이 회사 공장을 찾았을 때 “직원이 눈에 띄지 않는 이유가 뭐냐”고 묻자 얀스페데르 페데르손 마케팅담당 이사가 내놓은 대답이다. 시장점유율 1위 기업으로서의 자부심이 묻어난다.

덴마크 하면 얼핏 낙농국 이미지부터 떠오르지만 노보 노디스크처럼 ‘세계 1등’ 기업이 수두룩하다. 그래서 덩치는 작아도 1인당 국민소득이 5만 달러에 육박해 프랑스·독일을 앞선다. 다음달 8일 덴마크 여왕 마르그레테 2세의 첫 한국방문을 계기로 덴마크의 경쟁력을 살펴봤다.

◆품질로 승부하는 일류 기업들=서울 서초동 삼성타운의 신축 공사에도 첨단 기술을 가진 덴마크 기업이 참여한다. 세계적인 방음·단열재 제조사인 다놀라인이다. 이 회사의 존 크리스텐센 사장은 “우리는 친환경 소재만 사용하기 때문에 삼성타운 입찰 때 가격 면에서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품질로 삼성의 선택을 받았다”고 말했다. 다놀라인은 핀란드 헬싱키의 노키아 본사, 두바이의 에미레이트 항공 본사 건축에도 참여했다.

도자기 회사인 ‘로얄 코펜하겐’ 역시 세계 최고의 명성을 갖고 있다. 덴마크 수도 코펜하겐 중심가에 있는 대형 매장에는 하루 종일 외국인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가장 싼 찻잔이 개당 5만원이나 했지만 찾는 사람이 많아 품절되기 일쑤라고 했다. 1775년 왕실의 지원으로 설립된 이 회사는 모든 제품을 1197번 붓질한 뒤 구워 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기업가들의 천국=국토는 한국의 절반 크기, 인구도 550만 명에 불과한 덴마크에서 세계 1등 기업이 줄줄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기 위한 정부의 각별한 노력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유연한 고용 환경이 대표적이다. 내·외국 기업을 가리지 않고 사업주는 아무 조건 없이 직원을 해고할 수 있다. 최저임금에 대한 규제도 없다. 대신 정부는 적극적인 실업대책으로 사회 안정을 유지한다. 실업자들이 전 직장에서 받던 급여의 80% 정도를 4년 간 실업수당으로 주고, 적성과 경력에 맞는 새 일자리도 연결해 준다. 고용의 유연성(Flexibility)과 사회보장(Security)을 더한 덴마크식 ‘플렉시큐리티’(Flexicurity) 모델이다.

덴마크는 지난해 법인세율을 27%로 낮췄다. 유럽 주요국들의 법인세율은 대개 30%대다. 기업에 대한 규제도 적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덴마크는 유럽에서 법인을 설립하는 데 가장 시간이 적게 걸리는 나라다.

안 스테펜센 덴마크 무역협회 회장은 “덴마크에서는 적어도 기업 설립과 운영에 대해선 관료주의라는 말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자부했다. 그는 “덕분에 덴마크 내 신규 창업은 물론 외국 기업의 진출이 갈수록 늘고 있다”며 “이것이 덴마크를 먹여 살리는 힘”이라고 강조했다.

코펜하겐(덴마크)=전진배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