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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비서실>179.황태자 박철언(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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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盧泰愚대통령을 「물」이라고 부른데는 여러 의미가 있겠지만 그중의 하나는「명배우 盧泰愚」라는 말과 맥을 같이한다.물은 담는그릇에 따라 모양이 바뀐다.배우라는 말 역시 참모의 연출에 따라 움직인다는 의미며,명배우라면 연출에 그만큼 충실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같이 대통령의 생각과 움직임,다시말해 국정의 가닥과 방향을틀지은 그릇.연출가 가운데 6共 초반을 요리한 참모는 단연「황태자 朴哲彦」이었다.그는 6共 초반을 연출함으로써 6共 전체의모양새를 결정지었기에 당시 권력세계를 안다는 사람이면 누구나『朴哲彦을 빼고 6共을 얘기할수 없다』는 주장에 동의한다.
대선 열흘 후인 87년 12월26일 힐튼호텔.
월계수회원 1천여명이 승리를 자축하는 망년회를 열고 있었다.
이들은 대개 황제의 신임장과 같은「마패」(월계수 핵심요원에게 나눠준 메달) 소유자들로 나름대로 창업공신임을 자부했기에 자축연은 절로 흥이 올랐다.
이때 이 자리에 盧泰愚당선자가 나타나 이들의 흥을 절정에 올려놓는 한마디를 했다.
『여러분들이 도와주셔서 제가 당선될 수 있었습니다.선거에서 이긴 2백만표는 여러분의 공입니다.』 이 자리에 참석했던 한 핵심관계자 Q씨는『음지에서 몰래 활동해 대권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해온 우리들은 그때「盧당선자가 이제야 속에 있는 고마움을 털어놓는구나」라고 느꼈어요.「드디어 해냈다」는 자부심과 함께 온세상이 우리 손에 들어온 듯한 환상에 빠졌죠』라고 그날의 감격을 더듬었다.
Q씨의 감격을 조금 더 부풀리면 이는 곧 월계수회의 실질적 리더였던 朴哲彦특보의 심경이었으리라 짐작된다.
朴특보야말로 「대권을 만들어냈다」는 자부심과 함께「온세상이 내손안에 있다」라는 자신감에 부풀어있을만 했다.
盧당선자가 朴특보에게 직접 어떤 얘기를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盧당선자가 다른 여러 공신들에게 한 말들을 통해 사실상朴특보의 황태자 책봉을 확인할 수 있다.
창업공신중의 한 사람인 金容甲前총무처장관의 기억.
『취임직후 어느 자리에서 盧대통령이「黨에서는 이번에 한 일이없어.朴哲彦이 연구소(당시 월계수회라는 이름은 공식적으로 사용되지 않았고,월계수회모임들이 대개 연구소 형태로 조직돼있어 「연구소」로 불렸다)에서 애썼지」라고 말하더군요.
속으로는 굉장히 섭섭했지만 그냥 「黨에서 공식적으로 활동한 것도 중요합니다.다른데 가서는 그런식으로 얘기하지 마십시오」라고만 말해 주었지요.나중에 보니까 다른 사람들도 이미 그런 얘기를 많이 들었더군요.』 같은 얘기를 들었던 다른 창업공신 Z씨는 특히 盧당선자의 머리 속에 이같은 인식이 확고히 자리잡은원인을 이야기했다.
『朴哲彦이 盧당선자 옆에서 끊임없이 월계수회의 공로를 강조했기 때문이죠.盧대통령은 알다시피 귀가 엷은 사람이잖아요.옆에서자꾸 말하면 그런가보다고 생각하게 마련이죠.朴특보가 하는 말은아주 논리적이고 확신에 찬 단정적 어투이기에 盧당선자의 마음을사로잡을만 했죠.특히 이 과정에서 金玉淑여사의 역할도 컸어요.
朴哲彦은 자신이 직접 盧당선자에게 말하기도 했지만 한편 金여사에게도 같은 얘기를 반복함으로써 盧당선자의 생각에 영향을 미치도록 했죠.金여사가 수시로 盧당 선자에게「당신,哲彦이 공을 잊으면 안돼요」라고 속삭였다고 하더군요.심지어 취임행사장으로 향하던 차 안에서까지「청와대에 들어가서도 哲彦이 공을 잊지 말아야 돼요」라고 말했다고하니 盧당선자의 머리 속은 朴哲彦과 월계수회로 꽉 찰 수밖에 요.』 당시 청와대 관계자 X씨는『월계수회를 대선 이후에도 계속 존속시키기로 한 盧대통령의 결정은 바로 朴哲彦후계구상을 말해준다』고 설명했다.
『대선직후 盧당선자는 朴哲彦특보가 주장한 월계수회의 확대.강화를 허락했지요.그때부터 월계수회라는 이름이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죠.이는 「이제 대권을 잡았으니까 음지에서 나와 떳떳하게 공개적으로 활동을 본격화한다」는 의미입니다.
월계수회 존속의 대외 명분은 대선 과정에서 공약한 중간평가에대비한다는 것이었습니다.물론 그런 이유도 있지만 盧대통령과 朴특보간에 내밀하게 공감한 실질적 이유는 朴특보의 정치적 위상을강화해주는 조직으로 월계수회를 활용한다는 생각이 었죠.그 이면에는 朴특보를 정치적으로 키워 후계로 삼아보겠다는 생각이 깔려있었죠.나중에는 盧대통령의 생각이 바뀌었지만 처음에는 분명히 후계자로 키워보겠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그러니까 정국의 주도권을 전적으로 朴특보에게 맡긴 겁니다.
이런 사정을 눈치채지 못한 주변 사람들이 아무리 朴특보를 견제하려해도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은 당연했죠.盧대통령은 朴특보를 견제하는 사람들에게「아직 어리다.그러지말고 哲彦이를 좀키워달라」고만 말하곤 했죠.이는 그냥「봐달라」는 얘기가 아니라「그래서 잘 크면 후계로 삼을수도 있다」는 생각이 깔린 얘깁니다.』 ***“다녀갔구나”짐작만 한편 이같은 朴특보의 막강한 영향력이 잘 드러나지 않은 이유는 朴특보 특유의 은밀한 영향력행사 방식 때문이다.
또 다른 청와대 관계자 W씨의 증언.
『朴특보는 수시로 청와대 안방을 들락거리는 친척이니 주위 사람들이 그가 盧대통령에게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수 없죠.물론 가까운 친인척,처남 金復東.동서 琴震鎬씨등과 함께 모이는 가족모임도 있었지만 朴특보는 이와 무관하게 무상 출입 했습니다.특히 朴특보는 저녁시간에 독대하는 방식을 선호했기에 처음에는 이런 독대 사실조차 거의 알려지지 않았을 정도였습니다.대통령의 태도가 밤새 바뀌었을 경우「朴이 다녀갔구나」라고 짐작할 뿐이었죠』라고 말했다.
내각인선 발표를 며칠 앞둔 2월 중순 어느날 밤 삼청동 안가. 盧차기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李賢宰 총리내정자.洪性澈비서실장 내정자,그리고 李春九 취임준비위원장등이 모여 최종 인선작업을 마무리짓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화합 차원에서「고른 인재등용」을외쳐온 6共의 첫 내각부터 장관중 대통령의 고향사람,즉 TK가너무 많았던 것이다.더욱이 내무.재무.법무.국방.정무1등 주요장관이 대부분 TK였다.내무.재무.법무.국방 은 장관 서열상 두번째부터 다섯번째까지 나란히 붙어있어 더욱「TK 중용」인상을주기에 충분했으며,특히 재무.법무.국방은 대통령의 경북고 동창이었다. TK인상을 지우면서 組閣의 틀을 가능한한 유지하기위한궁여지책으로 가장 눈에 띄는 재무.법무.국방중 가운데인 법무를바꾸자는데 의견이 모아져갔다.
밤 10시쯤 盧대통령도 거의 동의했는데 갑자기『朴哲彦특보한테연락해보라』고 지시했다.
잠시후 도착한 朴특보는 이견을 내세웠다.그는『법무부와 검찰은서열을 중시하는 조직입니다.그런데 지금 서열상 丁海昌씨밖에 없습니다』고 법무장관 경질에 반대한뒤『정 바꿔야 한다면 차라리 국방장관을 빼는게 나을듯 합니다.그리고 발표 순 서상 뒤쪽에 있는 일부 장관을 바꾸시죠』라고 제안했다.
이렇게 해서 丁법무장관은 탈락의 벼랑끝까지 갔다가 유임됐으며,국방장관은 TK가 아닌 吳滋福(京畿출신)前합참의장으로 결정됐다.그리고 서열상 뒷부분의 일부 장관이 非TK로 바뀌었다.
언뜻 스쳐지나가는 짧은 장면이지만 여기서 朴哲彦의 힘은 확실히 확인된다.차기 정권의 최고요직인 국무총리 내정자와 비서실장내정자,그리고 정권 창출의 1등 공신인 취임준비위원장등이 차기대통령을 설득해 거의 결정됐던 내용,그것도 가장 중요한 의사결정인 장관 인선작업이 朴특보의 한마디로 좌지우지된 셈이다.
***비서실 人選에 신경 당시 분위기에 대해 W씨는『정확히 확인되지는 않지만 아마 장관 인선 내용을 수정하는 과정에서 盧당선자가 朴특보를 불러 최종 스크린하고자 했던 것은 거꾸로 말해 당시 최종 검토대상이었던 인사내용 역시 朴특보가 盧당선자와미리 얘기했 던 내용이었다는 말이 되겠죠』라고 유추 해석했다.
朴특보와 가까웠던 X씨는 같은 맥락이면서도 다소 다른 분위기를 기억했다.X씨는『朴특보는 사실 장관 인선에는 별로 신경을 안썼어요.盧당선자가 물어오면 자신의 의견을 얘기했고,盧당선자가朴특보의 의견을 충분히 받아들인 것은 사실이겠지 만.朴특보가 장관인선에 신경을 덜 썼던 것은 「장관은 누가 하든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었죠.朴특보는 장관이 누가 되든 자신이 정국을 주도해가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고 생각한거죠』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오히려 朴특보가 신경을 쓴 부분은 청와대수석 인선이었죠.청와대수석이란 조석으로 대통령과 만나는 자리인만큼 장관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중요한 자리니까요.또 朴특보 본인이 청와대에 들어가려고 생각했으니까요』라고 덧붙였다.
사실 朴특보가 조각 과정등에서 얼마나 영향력을 행사했는지는 정확히 알수 없다.그러나 X씨의 말처럼 朴특보가 청와대 비서실인선과정에서 드러낸 의지는 상대적으로 보다 여러면에서 나타났다. 〈吳炳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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