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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뇌 속을 손금 보듯 … 54. 과학원 정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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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1996년 타계한 조순탁 박사는 과학원 원장 때 필자를 정교수에 임명하는 등 끔찍이 배려했다.

나를 한국으로 불러들인 KAIST (당시는 KAIS 라 했음) 조순탁 원장은 나에게 많은 배려를 해줬다. 나를 초빙이나 겸임 교수 등으로 받아들인 게 아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한국 대학에는 교수 중에서도 여러 종류의 교수가 있다. 초빙 교수나 겸임 교수의 경우 대학원생을 맡아 지도하는 소위 ‘지도 교수’라는 것을 할 수 없다. 무술에서 이야기하듯 연구의 한 파(派)를 만들 수 없다. 조 원장은 그걸 염려해 나를 불러들일 때 신분을 정교수로 해줬다.

지금 시대에는 그렇게 하려면 많은 무리수가 따르지만 그 때는 가능했다. KAIST와 그 수장인 원장의 사회적 지위와 권위가 대단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원장은 서류에는 없지만 사회적으로 장관급 대우를 받았다. 장관을 역임한 사람이 원장으로 부임하기도 했다.

그랬기 때문에 조순탁 원장이 나를 파격적으로 정교수 신분을 부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외국에서 갓 들어온, 더구나 부정기적으로 머무는 조건인 나를 그렇게 정교수로 대우 한 것은 KAIST에서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그 당시 KAIST 교수들의 경우 전반적으로 특급 대우를 받았다. 같은 급의 교수라고 해도 서울대 교수보다 월급을 세 배나 많이 줬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특별 명령으로 그렇게 했다. 당시 KAIST는 대학원생만 있는 곳이었다. 학생들은 이곳을 졸업하면 전원 군복무가 면제됐다. 물론 대신 국립연구소에서 의무기간을 근무하는 조건이었다. 그게 요즘의 대학원 졸업생을 대상으로 하는 전문요원 병역특례제도의 시초다.

한국의 ‘공학 사관학교’ 쯤으로 키우기 위해 이 학교에 온갖 특혜를 줬었다. 대학원에도 전국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KAIST의 전체 교수는 50여 명이었으며, 내가 속한 전기전자공학과는 10명 정도로 가장 규모가 컸다. 학과에는 원로 박송배 교수 한 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나보다 나이가 적었다. 타계한 은종관 교수, 광주과기원장을 지낸 나정웅 교수 등이 당시 같은 과에 있었다. KAIST에서 나처럼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강의하는 교수로는 생물공학과의 유두영 교수가 있었다.

정교수는 부교수나 조교수에 비해 연구 정착금의 규모도 컸다. 정교수는 10만 달러, 그 이하는 5만 달러를 학교에서 지원했다. 그걸로 실험장비를 사고, 연구실을 꾸며 연구에 매진하라는 배려였다. 요즘 시대에도 이렇게 배려하는 대학은 찾아보기 어렵다. 서울대도 현재 갓 영입한 교수의 첫 연구 정착금이 3000만~1억원이라는 중앙일보 기사를 읽은 적 있다. 당시 10만 달러는 우리 돈으로 1억원 정도였으며, 지금 가치는 50억원가량 될 것이다. 벌써 약 30년 전 일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정부가 KAIST 교수들을 얼마나 우대했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런 우대 정책에 힘입어 배출된 우수한 인재들이 지금 산업계 및 교육계 등에 포진해 한국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우리나라 교육 정책 중 가장 성공한 것으로 손꼽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 한가운데에 내가 있었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너무나 영광스러운 일이다. 서울 청량리 근처 홍릉에 있는 KAIST의 교정은 언제 가봐도 고향 집 같은 곳이다.

조장희 <가천의대 뇌과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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