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푸아뉴기니 내전을 배경으로 한 어느 섬마을 소녀의 가슴 아픈 이야기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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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푸아뉴기니의 부건빌 섬은 1990년대 초 내전이 일어난 곳이다. 그곳은 세계 최대 규모의 구리 광산이 있는 곳이지만 정작 주민은 아무런 혜택도 누리지 못한 채 각종 환경 파괴와 오염에 시달려야 했다.

원래부터 파푸아뉴기니의 다른 지역 사람들과는 인종과 문화가 확연히 달랐기에 섬에서는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반군 세력이 조직되었고, 이를 토벌하기 위한 파푸아뉴기니 정부군과의 대치는 10년간의 내전으로 이어졌다. 내전은 휴전으로 종식되었지만,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잊혀져간 내전들이 그랬던 것처럼 막대한 손실과 슬픔만을 남겼다. 부건빌에서는 2만 명이 희생되었고, 4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파푸아뉴기니 내전을 배경으로 한 《미스터 핍Mister Pip》은 뉴질랜드 태생의 작가 로이드 존스(Lloyd Jones)가 부건빌에서 탈출한 생존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다. 전쟁이 소설의 배경이 되지만 작가가 담은 이야기들은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서로를 보듬어주는 소박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한 소녀의 순수한 눈으로 바라본 섬의 일상은 전쟁 중에 일어난 여러 가지 가슴 아픈 일들이 잔잔하고 담담하게 그려지고 있어 오히려 더 슬프면서 아름답다.

《미스터 핍》은 이미 뉴질랜드 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2007년 독자들이 뽑은 책으로 선정되었으며, 작가 로이드 존스는 이 책으로 오스트레일리아 연방작가상 수상과 함께 2007년 세계적 권위의 부커상 후보에 오르며 세계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다.

전쟁, 소녀, 그리고 한 권의 책
내전으로 봉쇄령이 내려진 부건빌 섬. 이는 어른들에게는 불안한 현실이었지만 아이들에게는 무료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더구나 더 이상 섬에 남은 선생님도 없어 학교마저 문을 닫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들은 새로운 선생님이 학교의 문을 열었다는 반가운 소식에 들뜬 마음으로 학교로 향한다. 그런데 그 선생님이란 사람은 너무나 의외의 인물이었다. 봉쇄령과 함께 섬을 빠져나가지 않은 유일한 백인, 와츠 씨였다.

그는 예전부터 섬사람들과는 가까이 지내거나 말도 섞지 않으며 조용히 지낸 사람이었다. 더구나 어릿광대 코를 달고 흑인 아내를 손수레에 태워 끌면서 다니는 기이한 행동 때문에 마을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호기심의 대상이며 기이한 인물로 여겨진 사람이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선생님으로서 그의 목소리를 처음으로 듣게 된다.

“난 너희들에게 정직할 것이다. 나한테는 지혜나 학식, 그 무엇도 없다. 내가 너희들에게 말할 수 있는 진실은 우리가 배워야 할 모든 것은 너희들과 나 사이에 있다는 사실이다. 아, 그것은 물론 디킨스 씨란다.”

이런 모호한 말을 들은 아이들은 와츠 씨가 디킨스 씨라는 새로운 선생님을 데려오는 줄 알고 기대한다. 하지만 학교를 찾은 다음 날, 와츠 씨는 영국 작가 찰스 디킨스가 쓴 《위대한 유산》을 읽어주기 시작한다. 소설을 처음으로 접하게 된 아이들은 이내 이야기 속으로 빠져든다. 아이들은 점점 ‘핍’이라는 소설 속 주인공에게 일체감을 느끼며 그가 겪고 느끼는 사건과 감정에 동화되어간다. 핍이 느끼는 좌절, 행복감, 사랑, 후회를 동시에 느끼며 그가 진정한 신사, 즉 아무리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인간으로서의 고매함을 잃지 않는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을 함께 체험하게 된다.

《미스터 핍》은 감수성이 예민한 소녀 마틸다가 일인칭으로 들려주는 가슴 아픈 성장소설이다. 마틸다는 《위대한 유산》에 매료되고 소설 속의 주인공 핍을 실제 인물처럼 가깝게 느낀다. 이를 통해 마틸다는 새로운 세계를 꿈꾸며 언젠가는 자기도 핍처럼 다른 세계로 가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리라는 희망을 갖게 된다. 하지만 전쟁이라는 상황은 마틸다를 포함하여 섬 주민들에게 너무나 가혹한 일들을 겪게 한다.

어느 날 섬으로 들이닥친 정부군들은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반군을 숨겨둔 사실을 실토하라고 다그치던 중 해변에 조가비로 꾸며놓은 ‘핍(Pip)’ 이라는 이름을 발견한다. 그것은 마틸다가 《위대한 유산》의 주인공 핍에 대한 애정으로 만들어놓은 것이었지만, 정부군들에게는 도저히 설명하기 힘든 흔적이었다. 군인들은 이제 마을 사람들에게 핍이 누구인지 실토하라고 하지만 결국 오해를 사 와츠 씨가 핍으로 몰려 숨지게 되고, 그 와중에 마틸다의 엄마까지 정부군들에게 잔인하게 죽게 된다.

눈앞에서 처참한 광경을 목격하며, 소중한 사람들을 잃은 마틸다는 삶을 포기하려 하지만 와츠 씨가 들려준 《위대한 유산》에서 힘과 용기를 얻어 섬을 탈출하여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그녀는 영문학을 전공하게 되고 교사로서 살아간다. 물론 아이들에게 《위대한 유산》을 읽어주곤 한다. 훗날 마틸다는 오래전에 계획한 대로《위대한 유산》의 배경이 된 영국을 여행하고, 영원한 친구 핍을 소개해준 소중한 선생님 와츠 씨가 살던 곳을 찾아가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와츠 씨의 전부인을 만나 그에 대해 듣게 된다. 그가 왜 어릿광대 코를 달고 섬을 거닐었는지…….

사람을 만들며, 때로는 사람을 살리는 ‘책’ 의 위대한 힘
책 읽기는 단지 눈으로 글자를 좇는 행위가 아니라 글이 만들어내는 세계에 스며들어 주인공과 하나가 되는 것이므로 책을 읽는 척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와츠 씨는 말한다. 아울러 그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목소리가 순수하게 살아 있는 자신 안의 공간’을 찾아보라고 말하며 찰스 디킨스도 《위대한 유산》을 쓸 때 머릿속 공간을 비우고 주인공 핍의 목소리가 들리기를 기다렸다고 덧붙인다.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자신만의 마음속 공간과 창작에 대한 그의 통찰력은 책이란 존재가 가진 소중한 가치를 우리에게 잘 설명해주고 있다. 《미스터 핍》은 한 소녀의 가슴 아픈 성장기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사람을 만들기도 사람을 살리기도 하는 책의 위대함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다. 마틸다가 고통 속에서도 살아남아 자신의 상처를 치유해갈 수 있었던 것은 《위대한 유산》의 핍과 함께한 경험을 통해, 자신 안에 울려 퍼지는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미디어의 홍수 속에서, 책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다. 《미스터 핍》은 우리에게 책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책이며, 나아가 삶에 대한 자세를 한 소녀의 성장기를 통해 조용한 목소리로 전한다는 점에서, 깊고도 간절한 반향을 일으키는 책이다.

* 도서명 : 미스터 핍
* 발행 : 대교베텔스만
* 로이드 존스 지음 / 360쪽 / 8,800원

조인스닷컴(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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