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 여왕' 사랑도 예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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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사업하면서 쟁쟁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 봤지만 겉만 번지르르한 마음의 장애인들이 많더군요. 제 약혼자는 비록 손 하나 제대로 못 움직이는 전신 장애인이지만 맑은 심성을 가진 사람입니다."

성공 벤처기업의 5백억원대 지분을 갖고 있어 '벤처 신데렐라'로 불리는 이수영(李秀煐.39.여)씨가 전신 장애인 재미한인 검사와 결혼한다. 상대는 정범진(알레스 정.37)씨로 현재 뉴욕 브루클린 지방검찰청의 부장검사다.

발레리나 출신인 李씨는 온라인 게임업체 웹젠의 대주주(지분 8.89%)로 지난해 이 회사가 코스닥에 등록되면서 일약 벤처갑부로 떠올랐었다.

李씨는 29일 "지난해 크리스마스 이브 때 정검사의 프러포즈를 받고 결혼을 결심했으며, 오는 10월에 한국 또는 미국에서 결혼식을 올릴 계획"이라고 밝혔다.

정검사는 조지워싱턴대 법과대학 재학 중이던 1992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셋째 경추(C3)의 척수신경에 손상을 입어 전신마비 장애인이 됐지만 역경을 딛고 최연소로 뉴욕 브루클린의 부장검사로 임용돼 화제가 된 인물이다.

두 사람의 인연은 2002년 4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정검사가 한국을 방문해 한 TV 토크쇼에 출연한 모습을 보고 李씨가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정말 기막힌 상황임에도 용기를 잃지 않고 일하는 모습이 너무나 인상적이었다"는 게 李씨의 고백이다.

이때부터 李씨의 '짝사랑'이 시작됐다. 李씨는 적극적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정검사를 소개시켜 달라고 부탁도 했으며, 그해 9월 뉴욕에서 정검사에게 e-메일을 보내 만남을 청했으나 답장을 받지 못했다. 그해 말 정검사가 다시 한국을 방문했을 때도 李씨는 호텔까지 찾아갔지만 정검사는 이미 출국해 태평양을 건너고 있었다.

결국 지난해 5월 이런 사연이 한 스포츠 신문에 보도된 것을 본 정검사의 아버지가 중간에 나서면서 두 사람은 지난해 8월 뉴욕에서 첫 만남을 가졌다.

"정검사는 본인이 처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더군요. 자기가 할 수 있는 부분과 할 수 없는 부분을 정확히 구분하면서 현실에 만족하며 사는 모습이 저를 너무나 강하게 잡아당겼습니다."

李씨는 그 후 정검사와 태평양을 오가며 사랑을 키워왔단다.

"지난 크리스마스 이브 날 정검사는 레스토랑에서 휠체어를 타고 프러포즈하는 모습이 어색했던지 제 호텔방을 직접 찾아와 청혼했습니다."

李씨는 주변의 반대가 없었느냐는 질문에 "부모님도 생각보단 흔쾌히 허락해주셨다. 이젠 독립적으로 결정할 나이도 됐고, 내 나이가 이렇게 많은데 반대하겠어요"라며 활짝 웃었다.

일단 李씨는 거처를 뉴욕과 서울에 모두 마련, 양쪽을 오가며 바쁜 생활을 할 예정이다. 가족 계획에 대해 묻자 李씨는 "입양도 괜찮다고 보나 정검사가 아이 욕심이 많아 앞으로 상의해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제 약혼자는 휠체어에 설치된 안전벨트를 풀면 몸을 지탱하지 못하는 전신 장애인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일을 할 때도 누군가 옆에서 도와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선택한 길이니까 최선을 다해 돕고 사업도 열심히 해서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겠습니다." 李씨의 목소리에서 행복이 묻어났다.

윤창희 기자

◆이수영은 누구=세종대 무용학과 출신이면서도 2000년 5월 웹젠을 공동창업한 뒤, 2001년 온라인 게임 '뮤'를 상용화해 리니지와 함께 대표적인 온라인 게임으로 키운 여성경영인이다. 지난해 웹젠이 코스닥에 등록할 당시 코스닥 기업으로는 최대인 3조3천50억원의 자금이 몰려 화제가 됐었다. 2002년 9월 웹젠의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뒤 여성 전용 포털 마이클럽 대표를 맡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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