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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거기 그녀가 서 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9면

도깨비는 매일 아침 기도실에 나타나서 우리를 들볶았는데,제일만만한「껀수」가 시말서였다.도깨비는 전날 우리가 학교를 나가면서 바치고 간 시말서가 엉터리라고 인상을 팍팍 쓰면서「오늘이 마지막 기회」라고 몇번씩이나 공갈을 치는 거였다 .「더 길게 더 자세하게 더 솔직하게」,이게 도깨비가 아침마다 요구하는 시말서의 원칙이었다.도깨비가 진짜 원하는 게 무언지는 모르지만,정학 나흘째가 되는 날 아침에는,시말서에 쓴 내용은 다 용서해줄테니 있었던 일들을 다 그대로 써야 한다고 그랬다.
도깨비는 첫날과 둘쨋날에는 그냥 시말서를 써내라고 했다가,사흘째 되는 날에는 백지 다섯장 이상의 분량으로 써내라고 했다가,나흘째 되는 날에는 원고지 스무장 이상이라고 했는데,그건 우리가 사흘째 되는 날 백지에 글씨를 아주 크게 써 서 다섯 장씩 제출했기 때문이었다.나중에 원고지에 시말서를 쓰면서,나는 띄어쓰기와 문단 나누기를 그렇게 철저하게 지켜보기는 그때가 난생 처음이었다.
어쨌거나,나흘째가 되는 날 내가 써낸 시말서는 다음과 같다.
〈시말서 혹은 반성문〉 돌이켜 보면,어떤 유명한 시인의 말대로,4월은 정말인지 잔인한 달인게 맞았습니다.
저는 1학년때 좋아하던 한 여자애를 잊기로 작정하고 2학년 새 학기부터는 죽었다 하고 공부에만 열중하려고 결심했던 것이지만,그래서 3월 한달은 한눈 팔지 않고 그런대로 견뎠지만,4월이 되니까 예외없이 개나리가 피고 벚꽃도 기지개를 켜고 그러는것이었습니다.세상 만물이 생동하는 꼬라지가,죽어지내던 제게는 오히려 잔인하게 느껴졌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그즈음에,써니라는 아주 매력적인 여자애가 요술처럼 훌쩍내 앞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날도 우리는(상원 영숙 승규 그리고 나)학교공부를 마치고 학원으로 가던 길이었습니다.신촌로터리로 가는 샛길을 지나는데,야 저것들 봐봐 라고,우리중의 하나가 그랬습니다.그래서 보니까한 골목길의 안쪽에 여자애들 몇명이 서성대고 있 는 게 보였습니다.아니 저것들 저기서 뭐하는 거지…하고 누군가 그랬습니다.
우리가 골목 안으로 들어가 보니까 거기는 막다른 골목길이었습니다.여자애들이 여럿이었는데,벽에 몰아세운 두 명을 네 명이 에워싸고 있었습니다.대강 보니까 은단여고 애들이었습니다.
『어허,이거 왜 이래.사이좋게 지내야지.』 『우리끼리의 일이니까…너흰 참견하지 말구 가봐.』 우리 중의 하나가 여자애들의싸움을 말리는 척했더니,여자애들 가운데 덩치가 아주 큰 애가 우리 앞에 나섰습니다.그 덩치를 우리는 나중에「양아」라는 별명으로 불렀습니다.
『이런 꼴을 보구…우리가 그냥 못가지.』 우리 중에 하나가 어디 해볼테면 해보자 하는 태도로 양아 앞에 나섰습니다.아주 긴장된 분위기였지만 우리가 여자애들한테 밀릴리야 없었습니다.
『우선 저쪽 구석의 너희들은 가봐.빨리….』 겁먹은 얼굴을 하고 있던 여자애 두 명이 재빨리 골목을 빠져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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