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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간다>87.인도 불교의 聖地 부다가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전망대 밑으로 산기슭에 보이는 거대한 바위언덕이 석가가 6년간 고행을 한 그리드라쿠타다.그 위에는 석가가 앉아 수도하던 자리가 있다.
왕궁의 모든 영화를 버리고 출가했던 석가가 어쩌자고 남의 나라 왕궁이 내려다 보이는 이곳을 수도의 장소로 택했던 것일까.
아마도 이곳에서 14년을 수도한 끝에 득도했다는 자니교의 창시자 마하비라에게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닐까.
해탈의 도가 무르익을 무렵 석가는 무슨 연유에선지 홀연히 이곳을 떠나 분지 남쪽으로 보이는 고갯길을 넘어 고행의 길을 나선다. 곡식 낱알을 주워먹으며 네란자라 강을 따라 걷던 그는 어느날 강물에 빠져 헤어나질 못했다.이를 본 마을 처녀 수자타가 주는 젖죽을 먹고 회생한 석가는 지금까지 고수해온 고행을 통한 수도방식을 버리기로 한다.
강물에 몸을 깨끗이 씻은 다음 강건너 언덕위에 서있는 보리수밑에서 참선을 계속하던 그는 드디어 어느날 아침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해탈의 도를 깨우치게 된다.지금도 그 자리엔 당시 보리수의 4대손이 1백12세의 연륜을 간직하고 서 있다.
보리수 바로 옆에는 아쇼카왕때 세운 摩訶菩提寺가 하늘에 닿을듯 우뚝 서있다.
한면이 40여m씩이나 되는 거대한 장방형 석단 위에 피라미드모양으로 드높이 쌓아올린 이 스투파는 높이가 자그마치 60여m나 된다.
스투파 1층에 안치된 초대형 황금색불상으로 이어지는 길에서 티베트 승려들이 땀을 흘리며 五體投地(불교에서 두 팔과 머리를땅에 대고 절하는 법)를 하고 있었다.경내는 각국에서 모여든 순례자들로 붐볐다.
서기722년께 이곳에 이른 혜초는 감격한 나머지 왕오천축국전에 이렇게 썼다.
『본래의 소원을 이루어 대단히 기쁘다.』그러나 그 무렵 전란에 많은 불교 유적들이 불타버리고 불교가 본연의 모습에서 변질되고 있는 것에 대해 혜초는 개탄했다.
1만5천명의 학생들이 1천2백명의 교수와 함께 공부했다는 세계 최대의 날란다 불교대학이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건만 그는 쇠퇴의 길을 걷던 불교의 모습에 실망했던듯 인도 전역을 두루 여행한 다음 중앙아시아를 거쳐 6년만 에 중국으로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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