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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우주를 포용하는 작가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7호 21면

‘루시(Lucy)’는 1974년 에티오피아 하다르 지방에서 발견된 300만 년 전 여인의 화석을 부르는 애칭이다. 그러므로 ‘루시의 시간’이란 어느 한 인간이 가늠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인류의 시간이라고 불러야 할, 300만 년이라는 세월을 품고 있는 셈이다. 재일 설치작가 최재은(54)은 이처럼 아득한 주제로 14년 만에 국내에서 개인전을 열면서 시간과 존재에 대한 인류학적 상상력을 펼쳐놓는다. 루시의 골반뼈를 부드러운 느낌의 흰색과 곡선으로 형상화한 ‘루시’는 우리 자신의 기원을 발견하는 동시에 또다시 300만 년이 흐른 뒤를 상상하며 존재의 본질로 다가가게 하는 작품이다.

1970년대 중반 일본으로 건너가 꽃꽂이와 디자인을 공부한 최재은은 이후 전위그룹 ‘플럭서스’ 와 미니멀 아트 등을 오가면서 동시대 미술과 건축·영화 등의 종합예술을 포괄하며 창작의 영역을 넓혀왔다. 1995년 베니스 비엔날레 일본관의 대표작가로 참여했고, 국내에선 성철 스님의 사리탑 ‘선의 공간’ 같은 건축적 환경 조형작품을 통해 알려졌다. 이번 전시회는 작가의 20여 년 작품 세계의 근원과 의미를 이해하는 자리다. 특히 작가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여온 자연과 생명에의 사유를 확인하게 될 것이다.

전시되는 작품은 조각과 설치미술 등을 포함한 10여 점이다. 종이를 몇 년 동안 흙에 묻어 그 부식 과정과 흙 속에 묻힌 생명의 활동을 살펴본 ‘월드 언더그라운드 프로젝트’는 가장 오랜 시간인 15년이 흐른 흔적인 ‘월드 언더그라운드 프로젝트-마사이 마라’로 그 다음 이야기를 들려준다. 마사이 마라는 에티오피아와 가까운 케냐에 있는 지역. 이 밖에도 일본 부토 춤의 대가인 유시오 아마가추의 움직임으로 인간의 네 가지 기본 감정을 표현하는 영상작품 ‘희로애락’(사진), 현미경으로 관찰한 미생물의 세계를 캔버스에 인쇄해 새로운 세계의 심연을 보여주는 ‘발굴된 하늘’, 텅 빈 공간에 반짝이는 운모 가루를 뿌리고 시계 초침 소리를 더해 시간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자신’, 시간과 함께 굳어버린 호박 속의 벌레를 바라보는 ‘별을 바라보다’ 등이 전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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