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OBAL EYE] 국부펀드는 양날의 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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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호 21면

세계금융시장에 때 아닌 국가자본주의 악령(惡靈)이 되살아나고 있다. 산유국과 신흥 수출대국들이 막대한 보유외환으로 국부(國富) 펀드(Sovereign Wealth Funds)를 조성해 외국의 주식과 채권·부동산 등을 사들이기 시작하자 미국과 유럽연합(EU) 국가들이 방어선 구축에 나선 것이다.

국부펀드는 운영주체가 각국의 정부 당국이다. 이 때문에 정부 개입이란 ‘검은 손’이 국경을 넘나든다. 투자 동기에 정치적·전략적 고려가 끼어들어 시장경제를 왜곡시키고 투자대상국의 국가안보도 위태롭게 할 위험성이 다분하다는 이유에서다.

미국이 국부펀드들의 자국 기업 매수에 제동을 거는 입법안을 마련하고, 독일 총리와 프랑스 대통령 또한 EU 차원의 대책 마련을 공동으로 주문하자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이 발끈했다. 1990년대 러시아에 시장개방을 하라고 압력을 넣던 그들이 지금에 와서 러시아의 외국기업 매수를 견제하려 든다면서 ‘보복’ 가능성까지 들먹이고 있다.

현재 국부펀드의 총 규모는 헤지펀드(1조6000억 달러) 규모를 능가하는 2조5000억 달러, 앞으로 10년 내 17조 달러를 넘어 투자계의 최대 큰손이 될 것으로 모건 스탠리는 추정한다. 산유국 펀드들이 3분의 2를 차지하지만 중국과 싱가포르 등 아시아 수출대국들의 약진도 두드러진다.

이들은 지금까지 안정되고 수익률이 낮은 미국 재무부증권 등 공적 부문에 투자하면서 글로벌 금융시장의 안정화 세력으로 기여해왔다. 그러나 규모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높은 수익을 찾아 민간부문의 위험투자는 물론 외국의 민감한 전략산업에까지 손길을 뻗치고 있다. 매수한 자산을 갑자기 매각해 위기를 촉발시키거나 정치적 영향력 행사의 지렛대로 활용한다면 세계금융시장의 불안세력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얘기다.

무역적자를 외국인들의 자본투자로 메우는 미국, 그리고 푸틴의 에너지 무기화에 혼이 난 독일 등 유럽 국가들이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국부펀드의 운용은 싱가포르 투자공사가 한 모델이다. 미국과 유럽·일본 등의 안전자산에 대한 투자로 알찬 수익을 올려, 중국과 한국·일본이 벤치마킹을 시도 중이다.

펀드운용 내역과 방법, 전략 등의 투명성에 관해서는 노르웨이가 그 모델로 꼽히지만 대부분 국부펀드들은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중국이 석유공사를 앞세워 미국 석유회사를 사들이려다 안보상 이유로 좌절되는가 하면, 싱가포르의 한 국부펀드 테마섹이 실각된 태국 탁신 총리의 통신회사 주식을 사들이다 동남아에 정치적 후폭풍을 불러오기도 했다.

투자관행의 투명화와 대외투자 활동에 대한 정부보조 및 인센티브 제공금지 등 글로벌 규제장치를 지금부터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이 그래서 설득력을 얻는다. 국부펀드의 급성장이 저평가 통화 등 비현실적 환율정책에 따른 경상수지 흑자의 누적에 기인한다는 거듭된 볼멘소리가 정치적 반향을 일으켜 ‘금융 보호주의’로 치달을 위험도 적지 않다.

우리 정부도 한국투자공사를 세계적인 국부펀드로 키우겠다는 야심아래 200억 달러의 펀드 규모를 3년내 500억 달러, 2015년까지 2000억 달러로 늘릴 계획이다. 그러나 나랏돈을 ‘대박 아니면 쪽박’ 식으로 위험자산에 투자해선 안 된다는 우려 때문에 한국은행이 추가출자를 꺼리는 분위기다. 특히 우리의 외환보유액은 통화안정증권을 사들인 부채성 자산이 아닌가.

국부펀드는 분명 양날의 칼이다. 국내적으로 민영화와 민간자율을 주창하면서 외국의 민간부문에 정부들이 다투어 투자에 나서 ‘국경을 초월한 국유화’가 세계적으로 확산된다면 이 또한 세계화의 모순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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