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민원사는 민원창구(긴급점검 공무원 복지부동: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법규핑계 “나 몰라라”/모호한 규정 내세워 일단 “안된다”/사라졌다던 「봉투」도 우회로 오가
지하철 과천선이 잇따른 사고,「농수산물 유통 및 가격안정에 관한 법률」 파동 등 정부차원의 커다란 실책들도 공무원의 소극적인 대처에서 원인을 찾는 견해가 있지만 공직사회의 위축된 모습은 일선 민원창구에서 두드러진다.
『토지초과이득세 관계로 토지대장과 건축물대장을 떼오라 해 가져갔더니 이번에는 소유권 이전에 관한 등기부 등본을 가져오랍니다. 일부러 그랬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한번으로 가능한 일을 두세번 걸음시키는 것은 국가적으로도 낭비 아닌가요.』
13일 서울 종로구청에서 만난 H사 경리부의 임모씨(30)는 이같이 푸념하며 『전화로 예약을 해놓고 찾아갔는데도 1시간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공무원들도 민원창구에서의 소극적인 모습을 인정한다.
총무처의 한 고위간부는 『인·허가 담당부서에 특히 문제가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규정도 추상적이고 애매모호한 경우가 많은데 문제발생을 우려,안되는 방향으로 규정을 해석한다. 이럴 때 민원인은 안타까울 것』이라고 말했다.
또다른 관계자는 『지역주민 등을 위해 새로운 사업을 벌일 때도 종종 보신주의가 문제된다』며 이해관계인중 반대하는 사람이 있으면 사업추진을 보류하는 경우라고 지적했다.
사정당국은 무사안일 공직자의 가장 대표적인 유형으로 공무원의 합목적적 재량은 생략한채 법만을 강조하는 「법규빙자형」 또는 「법대로형」을 꼽는다. 『법규만 핑계대고 의사결정을 미루거나 조그마한 흠만 발견돼도 보완 등을 요구하지 않고 행정처분 자체를 거부하는 경우 등이지요.』
총리실의 한 관계자는 『법치행정이란 법정신을 헤아려 상식과 정의에 부합하도록 행정을 구현하는 것을 말하는데 형식적인 법조문에만 매달리는 풍조가 새정부들어 팽배한 실정』이라고 지적한다.
그 다음은 전결규정에도 불구하고 상사에게 떠넘겨 의사결정 기간을 불필요하게 연장하는 「책임전가형」 「적당주의형」,선례만 찾아다니는 「선례답습형」 「업무방치형」 등 무사안일의 유형도 여러가지다.
그러나 공무원들도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서울 종로구청에서 민원 관련업무를 맡고 있는 김모씨(35)는 『하루 민원 상담건수가 60∼70건에 이른다』며 『민원담당 공무원에게 친절을 기대하는 것은 도를 닦으라는 얘기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공무원 1명당 국민수도 우리나라가 49명으로 29명인 일본,14명인 미국·프랑스 등에 비해 월등히 높다.
가장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는 공무원 보수도 80년대이후 상당히 수준이 높아지긴 했으나 아직도 대다수의 대기업이나 국영기업보다 떨어지는 실정이라고 공무원들은 입을 모은다.
공무원생활을 시작한지 9년쯤 되었다는 서울시 모구청의 최모계장(40)은 『연 1천2백만원정도의 봉급이 가정수입의 전부』라며 『중학교 1학년과 국민학교 1학년의 두아들에게 남들이 다 받는 과외를 못시키고 잇다』고 말한다.
없어진 것으로 알려진 뇌물도 일보기가 어려워지고 공무원들의 현실 때문에 다시 등장하는 분위기다. 한 기업간부는 최근 정부기관에 서류를 제출하며 예전처럼 봉투를 첨부하지 않았는데 도무지 결재가 나지 않아 알고보니 다른 사람들은 이미 관청주변 대서소 등을 통해 봉투를 전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봉투엔 대서사 몫까지 없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공무원들이 민원인들로부터 직접 봉투를 받지는 않지만 안전한 통로를 통해선 받고 있고,이런 민원엔 복지부동이 없다.
공무원들의 복지부동이 어디서 오는지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서울대 김신복교수(행정학)는 『80년대 이후 공무원 보수인상률이 물가상승률을 앞지른 것은 사실이나 민간기업의 임금에에는 크게 못미쳤다』고 지적하고 『공무원에게 희생만 강요해선 안된다』고 말했다.
보수와 함께 중요한 사기지표라 할 수 있는 인사적체도 공무원들의 복지부동을 부추긴다.
10년전인 83년의 경우 6급 주사직에서 5급 사무관으로 승진하는 평균 소요기간은 7년이었으나 93년엔 9.4년으로 늘어났고,사무관에서 4급 서기관은 8년에서 11.3년으로,서기관에서 3급 부이사관은 7년에서 10.7년으로 증가해 1직급 승진하는데 10년은 빠른 편에 속한다.
총무처의 관계자는 『60년대 이후 발전행정시대에는 정부기구의 확대 등에 따라 초고속승진에 의한 30대국장도 더러 있었으나 이제는 행정고시를 합격한 경우도 절반정도만 국장이 되는 형편이며 7급으로 들어온 공무원들은 서기관되기도 하늘의 별따기』라고 공무원 인사적체의 심각성을 지적했다.
더구나 새정부들어 관료가 장·차관으로 승진하는 길도 줄고 있다.
결국 상대적으로 낮은 보수,승진기회의 감소 등 구조적 문제에다 그동안 동기여부의 역할을 해온 뇌물이란 윤활유도 없어짐에 따라 공무원들은 『가만히 앉아 자리를 지키는 것이 상책』이란 지혜를 터득해가고 있는 것이다.<김진원·곽보현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