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공간 이미지 '짱' 현실세계 흔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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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짱''몸짱''강짱'-.'짱'으로 끝나는 말들이 유행이다. 지난해 네티즌이 만든 최고의 조어(造語)였던, 얼굴이 으뜸이라는 뜻의 '얼짱', 39세의 평범한 전업 주부가 20대 못잖은 날씬한 몸매를 유지한다해서 나돌았던 '몸짱'.

이 때까지만 해도 장난기로 뭉친, 잠깐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이려니했다. 하지만 최근 특수강도 혐의로 현상수배된 용의자를 단지 예쁘다는 이유로 '강짱'(강도 얼짱)이라며 칭송하는 분위기가 일자 사방에서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다. 외모만을 숭배하는 현상이 못말리는 지경까지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짱' 현상은 우리 사회가 인터넷을 포함한 디지털 문화로 이행하면서 생겨난 자연스럽고도 필연적인 과정이라고 보는 시각도 많다. 복제와 변형이 자유로운 디지털 기술이 없었다면 요즘의 '짱'도 없었을 것이란 얘기다. 그러고보니 '얼짱'이든 '몸짱''강짱' 모두 디지털 사진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짱'이란 말은 원래 10대들의 은어였다. 1990년대 중반부터 초.중.고교 학생들이 즐겨 쓰기 시작한 '짱'은 또래들 중 가장 싸움을 잘하는 사람을 가리켰다. 최고라는 뜻의 '장(長)'을 세게 발음해 얻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이 무렵 '짱'을 소재로 한 영화나 만화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짱'이 어른들 세계에까지 들어오게 된 건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 지지자들이 그를 '노짱'으로 부르면서였다.

'짱'이 단순한 애칭을 넘어 신드롬으로까지 발전한 데는 '얼짱'의 공이 크다. '얼짱'은 디지털 매체인 인터넷 속의 스타다. 그것은 아날로그식 스타 개념을 뒤집는다. 네티즌이 스스로 만들어낸 자생적인 스타다. 연기자도 아니고, 가수도 아니고 뛰어난 운동 선수도 아니다.

그냥 인터넷에 올라온 디지털 사진을 본 이들이 '야, 멋지다, 우리의 스타다'라며 몰리면서 수십만명의 팬이 형성된다. 그렇게 뜬 '얼짱'들이 박한별처럼 연예계로 진출하기도 한다. 이전처럼 수동적으로 스타를 목매고 기다리는 게 아니라, 되레 네티즌들이 나서 스타를 연예계에 공급하는 것이다.

'얼짱'이 아날로그식 스타와 다른 또 한가지는 '콘텐츠'가 없다는 점이다. 기존 연예 스타들은 단지 멋지기만 한 게 아니었다. 험난했던 어린 시절을 극복했다든가, 마음씨가 비단결 같다든가, 제임스 딘처럼 사회에 반항적이라든가 하는 식으로 외모에 덧붙여진 '내면'이 있었다. 그것이 가공된 것이든 진실한 것이든. 그러나 '얼짱'은 사진 이외에는 아무런 실재가 없다. 디지털 이미지(사진)만으로 네티즌과 소통한다. 시각적 이미지가 가장 중요한 고려 사항이 된 것이다.

한국과학기술원 최혜실 교수('모든 견고한 것들은 하이퍼텍스트 속으로 사라진다'의 저자)는 이런 현실이 전혀 이상할 게 없다고 본다."인터넷은 글이 아니라 몸으로 나를 표현하는 시대의 도래를 의미한다. 인터넷의 속성상 외관의 이미지만 좇는 방향으로 가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현상수배 전단 속의 사진 한장만으로 특수강도 용의자가 '짱'으로 등극하게 된 것도 마찬가지다. 비주얼을 중시하는 인터넷의 특성이 극명하게 드러난 결과다. 법적.도덕적 기준으로 보면 하찮은 범죄자에 불과한 데도 그런 '내용'은 별 고려사항이 되지 않는다. 젊은 여성이 아리따운 얼굴을 하고 있다는 그 점 하나로 '짱'이 될 수 있었다. 물론 과거에도 범죄자가 '영웅'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사회의 부조리나, 부의 불균등한 분배에 대한 저항 등 나름의 지향을 갖고 있었다. '강짱'은 그녀의 죄질이 어떤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실체는 텅 비어 있는데 얼굴 사진만 떠돌면서 힘을 얻고 있다. '강짱' 팬 중 실제로 그녀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수배 전단 속 사진이 실제 그녀 모습과 얼마나 닮았는지, 아니면 디지털 기술로 조작된 것인지도 확인되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는 두 세계를 오가며 살고 있다. 하나는 발 딛고 서 있는 진짜 현실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인터넷 안에 존재하는 가상 세계, 즉 매트릭스다. 영화 '매트릭스'에서처럼 가상과 현실이 구별되지 않는 세계로 우리가 본격적으로 발을 들인 것일까. '강짱'은 가상 공간이 거꾸로 실제 현실을 지배하는 한 단면을 보여준다.

안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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