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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2.거기 그녀가 서 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9면

『사과나 배나 감이나,그러니까 과일을 생각해봐.아직 다 익기도 전에 겨우 씨알만한 열매가 맺혔다고 냉큼냉큼 따먹으면 누구손해겠니.그러면 한번도 제대로 잘 익은 걸 맛볼 수 없을 거 아니겠어.』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성문젠지 뭔지를 과일에 비유하시는 것 같았다.설마하니 써니네 계집애들을 지금 따먹는 게 손해라고 말씀하시는건 아닐테니까.
교장선생님은 무언가를 말씀하실 때 대개 다른 쉬운 예를 들어가며 설명하기를 좋아하셨는데,그건 교장선생님 당신의 생각이고,종종 예를 드는 게 주제와 딱 맞아 떨어지지 않아서 오히려 이야기를 헷갈리게 만들기가 일쑤였다.그래서 나는 매 주 한번씩 월요일 아침마다 교장선생님이 전교생을 운동장에 세워 놓고 훈시를 하실 때면 염려 반 기대 반의 심정으로 열 가운데 서 있고는 하였다.
가령 지난 주의 조회시간만 해도 그랬다.
교장선생님은 최근들어 지각하는 학생들이 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하루에 스물네 시간이 주어지는데,어떤 사람은 시간에게 지배당하며 끌려다니는가 하면 어떤 이는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잘 다스려서 여유있게 산다고 하셨다.거기까지는 괜찮았는데 그 다음에 또「예를 들면」하고 개 기르던 이야기를 계속하신 거였다.
언젠가 아주 영리한 셰퍼드를 한 마리 키울 때는 개밥을 주면적당히 먹다가 놀다가 또 적당히 먹고 그랬는데,나중에 비슷한 크기의 똥개를 키울 때는 전처럼 똑같이 하루에 두 번 개밥을 줬지만 후딱 다 먹어치우고는 금세 그때부터 줄곧 먹을 걸 달라고 안달을 떨더라는 말씀이셨다.같은 양의 개밥을 줬지만,셰퍼드는 그걸 잘 즐길 줄 알았고,똥개는 늘 먹이의 노예처럼 굴었다는 소리셨다.
나는 그날도 교장선생님의 예가 실패한 것 같아서 안타까웠다.
그래서 나는 손은 열중쉬엇 자세를 한 채 한쪽 신발코로 애꿎은운동장의 마른땅을 긁어대면서 생각했다.교장선생님의 훈시를 듣고전교생 가운데 과연 몇명이나 충성스럽고 영리한 셰퍼드처럼 살아가겠다고 결심했을까 하고.
하여간 나는 교장선생님의 책상 앞에 고개를 푹 꺾고 서서,제발이지 오늘은 교장선생님이 흉잡을 데 없이 근사한 말씀을 해서나를 제외한 세 녀석에게 나중에 놀림감이 되지 않기를 진심으로빌고 있었다.왜냐하면 녀석들은 나만큼 교장선생 님을 좋아하지는않았으니까.뿐만 아니라 녀석들은 누구나가 인정하는 지독한 악동들이니까.
그런데 교장선생님은 계속해서 예를 들고 계셨다.
『…생선같은 것두 그렇잖아.어느정도 자랄 때까지는 못잡게 한다는 거 배웠지.며루치만할 때 다 잡아먹으면 뭐가 남겠냔 말이야.그게 또 뭐 먹을 거나 있겠니.』 나는 녀석들이「따먹는다」거나「잡아먹는다」고 교장선생님이 말한 걸 가지고 속으로 얼마나재미있어 하고 있을까를 생각하니까 아찔했다.
게다가 우리는 이미 고교 2학년이고 절대로 설익은 열매나 며루치만한 생선은 아니었다.써니와 써니의 친구 계집애들은 교장선생님 보다 훨씬 키가 컸고 가슴도 컸다.교장선생님이 그 애들 보다 큰 건 허리밖에 없을 거였다.
그래도 나는 우리가 교장선생님을 이해해드려야 한다고 생각했다.그 분은 쉰 살이 넘도록 노처녀로 살고 계신 분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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