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1.거기 그녀가 서 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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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그는 머리로는 아니오 라고 말한다 그는 마음으로는 그래요 라고 말한다 그가 좋아하는 사람에겐 그래요 라고 말한다 선생님에겐 아니오 라고 말한다 그가 서 있다 선생님이 그에게 묻는다 온갖 질문이 그에게 쏟아진다 갑자기 그가 미친듯이 웃는다 그리고 그는 모든 걸 지운다 숫자와 말과 날짜와 이름과 문장과 함정을 갖가지 색깔의 분필로 불행의 칠판에다 행복의 얼굴을 그린다 선생님의 꾸중에도 아랑곳없이 우등생들의 야유도 못들은 척하고 -자크 프레베르 『열등생』 우리는 굳이 우리에게 적용된 죄목이 어떤 건지를 따지지 않기로 했다.괜히 잘난 척하다가는 통째로 굴러떨어진 호박을 놓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처벌이 취소되거나 혹은 집행유예가 되거나 하면 그 손해는 순전히 우리들몫이었으니까.
교장실에 불려가,우리 네명에게 일주일동안 정학처분을 내린다는학교당국의 결정을 교장선생님에게 통보받았을 때,나는 오히려 횡재처럼 주어진 이 일주일을 어떻게 뜻깊게 보낼 것인지에 대해 재빨리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교장실을 빠져나가는 대로 써니에게삐삐를 쳐 이 기쁜 소식을 알려줘야지.
…우리는 일주일간 특별휴가를 받았거든,너희들도 적당히 일주일쯤 정학을 받도록 해봐.그럼 이번에는 다같이 어디 여관같은 거있는 데로 가서 확실하게 반성을 하고 오자구.
음성 사서함을 이용하면 곧 답신이 있을 거였다.써니네 학교에서는 어떤 판결이 나올지가 문제였다.
『달수,그렇지?』 교장선생님이 갑자기 나를 지적하면서 물었기때문에 나는 얼른 무언가를 깊이 반성하고 있는 죄인처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네 라고 대답했다.그랬더니 옆에 서있던 녀석들이 참지를 못하고 키드득거렸다.죽을 때까지 영원히 서로 의리를지 키기로 백번도 더 맹세한 녀석들이었지만 이럴때 보면 다 소용없는 놈들이었다.나중에 알고 보니 이런 질문이셨다고 한다.너희들은 그저 대학이고 뭐고 빨리 장가나 갔으면 좋겠다 이거냐?교장선생님은 이어서,우리들의 창창한 장래를 생각해서 이번에는 아주 관대한 처벌을 내린 것이며,특별히 우리 네 녀석들 가운데누군가가 다음에 또 말썽을 부릴 경우에는 가차없이 퇴학시킬 수밖에 없다고 경고하셨다.그리고 고등학교에서 퇴 학당한다는 게 한 사람의 인생에 얼마나 치명적인 것인지에 대해서도 친절하게 설명해 주셨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교장선생님 말이다…,남자와 여자의 관계에대한 자신의 소신을 피력하셨는데,쉰 살이 넘도록 노처녀로 사시는 그분이 말씀하시기에는 주제넘은 주제가 아닌가 하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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