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만 부각한 미 언론의 사견/고대훈 파리특파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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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남아프리카공화국 총선을 현장에서 지켜보면서 혹시라도 다른 지역의세계인들이 나흘간의 투표가 흑백 또는 흑흑간의 좁혀질 수 없는 갈등속에 테러·폭력으로 얼룩진 대결과정으로 오해하지 않을까 우려됐다.
외국언론,특히 CNN 등 미국언론들이 총선의 진정한 의미보다 부정적 측면에만 초점을 맞추며 지구촌의 안방에 폭력사태만 전달한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들 매체들을 보면 하루도 빠짐없이 터지는 폭탄과 곳곳이 폭력사태가 집중적으로 조명돼 이번 선거가 국민화합은 커녕 남아공이 파멸의 구렁텅이로 떨어지고 있다는 착각에 빠질 지경이었다.
미국의 대표적 방송사인 CNN이나 CBS는 본격투표에 돌입한 27일 투표소 앞에 수천,수만명이 거대한 물결을 이루어가는 감동적 장면은 뒷전에 미뤄놓은채 이날 아침 발생한 얀 스무츠공항의 폭탄테러사건에 중계시간의 태반을 할애했다.
물론 폭력사태가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도처에서 극우 백인테러와 폭력이 이어지며 요하네스버그 시내에 중무장 장갑차가 진을 치고,주요 건물이 철조망을 두르고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는 것은 분명 현실의 한 단면이다.
그러나 폭탄테러만 없었다면 선거기간은 남아공 사상 가장 평화적인 날들이었다는데 이곳 사람들 대부분이 공감하고 있다.
정작 기득권을 빼앗기게 될지도 모르는 남아공의 백인들도 자신들이 장악하고 있는 신문·TV 등을 통해 투표를 통한 흑백과 흑흑의 화합에 초점을 맞추고,이번 선거는 새로운 남아공의 서막이라며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말도 나누지 않던 흑백이 하나로 뒤엉켜 뙤약볕 아래 수㎞씩 줄을 서 한표를 행사하기 위해 몇시간씩 기다리는 가슴 뭉클한 장면이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이었을게다.
얼마전 CNN이 북한핵으로 긴장이 고조되던 시점에서 남북한 동시 생중계를 남북 당국에 각각 요청했다가 우리측에 의해 거절당한 일이 있다. 남북간의 전쟁위협이나 전쟁공포만을 부각해 민족의 아픔을 희화화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다양한 지구촌 모습이 정보산업의 우위를 내세우는 미국언론의 획일성으로 좌지우지 되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이국에서 더욱 절실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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