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TER] 韓·美정상회담장의 의미 있는 해프닝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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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호 02면

작지만 눈길을 끄는 뉴스가 APEC에서 있었습니다. 한·미 정상이 7일 회담을 마치고 기자회견하는 자리에서 일어난 해프닝입니다. 통상 정상회담을 마친 두 정상은 간단히 ‘한 말씀’ 하는 의례적인 기자회견 자리를 갖습니다.

다른 정상회담처럼 먼저 부시 대통령이 간단히 회견을 정리하는 덕담을 했습니다. 이어 노무현 대통령이 같은 식의 말씀을 했습니다. 보통은 여기서 끝납니다. 그런데 노 대통령이 말을 마치면서 “(부시 대통령이) 조금 전 말씀하실 때 한반도 평화선언이나 종전선언에 대한 말씀을 빠트리신 것 같습니다”라고 덧붙였습니다.

영어통역이 좀 당황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의례와 관례를 중시하는 정상회담에서 드문 일이니까요. 그래서 통역은 노 대통령이 하지 않은 말을 덧붙여 격식을 갖추고자 노력했습니다. 통역은 “내 생각이 틀릴 수 있겠지만(I think I might be wrong)”이란 전제를 먼저 달고, 이어 “부시 대통령이 종전선언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듣지 못한 것 같습니다. 대통령께서 아까 얘기를 하셨습니까?”라는 질문 형식으로 완곡하게 표현했습니다. 그러자 부시 대통령이 ‘김정일에게 달렸다’는 내용으로 간단히 대답했습니다. 일반 기자회견에서 말하는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내뱉는다는 인상이었습니다.

그런데 노 대통령이 할 말이 남았다는 듯 왼쪽 집게손가락을 통역 쪽으로 뻗으면서 약간 허탈한 웃음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매우, 똑같은 얘기입니다. 똑같은 얘기인데, 김정일 위원장이나 우리 국민은 그 다음 얘기를 듣고 싶어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영어통역이 다른 얘기는 빼고 “똑같은 얘기라고 생각됩니다. 조금만 더 명확하게…”라고 하자 좌중에 웃음이 터졌습니다. 부시 대통령은 역시 빠른 목소리로 “더 이상 명확하게 얘기할 수 없습니다(I can’t make it any more clear)”라고 말한 다음 같은 말을 다시 간단히 반복했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Thank you, sir)”라는 말을 끝에 붙였습니다. 회견을 끝내겠다는 표현이죠. 많은 외신은 부시 대통령의 불쾌감이 느껴졌다고 언급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장면을 보면서 ‘노 대통령이 뭔가 마음이 바쁘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김정일 위원장을 언급하는 것을 보면서는 ‘정상회담 때문에 그런가 보다’는 생각도 떠올랐습니다. 반면 부시 대통령은 원칙적인 발언을 거듭 반복하는 완고한 모습이었습니다.

물론 정상회담의 성과는 있었다고 봅니다. 부시 대통령이 “김정일이 검증 가능한 핵폐기를 한 이후 종전과 평화선언을 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밝혔으니까요. 그리고 바로 이어 북 핵 불능화를 위한 실무 기술진이 북한을 방문하기로 했다는 발표가 이어진 것도 큰 성과입니다.

그렇지만 남북 정상회담을 의식해 노 대통령이 조급해하거나 무리한 결정을 내리지 않을까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네요.

정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남북 정상회담이 연기돼 오히려 충실하게 준비할 시간을 벌었다”고 하더군요. 정말 충실하고 투명한 정상회담이 되길 빕니다. 이상은 백악관 홈페이지(Whitehouse.gov)에 올라 있는 동영상을 참고해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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