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시론

북·미 관계 대전환 계기 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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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나는 이미 선택을 했다”며 자신의 임기 내 북핵 문제 해결을 자신한 이후 열린 실무회의에서 북·미 양국이 연내 2·13 합의 이행 완료를 확약함으로써 북·미 관계는 급물살을 타게 됐다. 이렇게 본다면 최근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 미국대사가 “내년에는 여태까지의 수많았던 터부를 넘어 빅뱅 수준의 대전환도 가능하다”고 말한 것이 빈말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이라크 전쟁의 수렁에 빠진 부시 행정부가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외교적 성과로 삼아야 할 절박한 사정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10월 북한의 핵실험 이후 한반도 정세는 대전환의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다. 북한의 핵실험은 ‘핵모호성 전략’을 넘어 핵 카드를 노출해 협상을 모색하는 벼랑끝 전술의 거의 마지막 카드다. 북한의 핵실험은 국제사회를 향해 ‘핵확산이냐 협상이냐’의 양자택일을 강요한 것이다. 북한의 핵실험을 충격 속에 목격한 국제사회는 북한 핵을 용인할 수 없다는 목표가 분명해졌다. 한국을 비롯한 동북아 인접 국가들은 북 핵실험을 직접적인 안보위협으로 인식하게 됐고, 부시 행정부는 비확산 정책의 실패를 자인할 수밖에 없는 수세에 몰리게 됐다.

  부시 대통령은 급한 불을 끄기 위해 지난해 11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한국전 종료선언 용의 표시’를 했다. 종전선언은 북한에 핵을 버릴 수 있는 명분을 줄 테니 비핵화를 실현하라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북한과 미국은 올 1월 베를린 양자 접촉에서 북 핵실험 이후 북·미 현안 전반을 논의했고, 곧이어 6자회담을 재개해 2·13 합의를 도출했다. 2·13 합의는 미국이 선 핵폐기 주장과 양자회담 불가 방침 및 잘못된 행동에 보상 없다는 원칙을 바꿔 ‘말 대 말’ ‘행동 대 행동’ 원칙을 수용해 만든 동시행동합의서다. 방코델타아시아(BDA) 북한 자금 송금 문제로 상당 기간 합의 이행이 지연됐지만, 이 문제가 해결되자마자 지난 6월 힐 차관보의 평양 방문이 이뤄지는 등 북·미 관계가 다시 급진전하기 시작했다.

북한이 남북 정상회담에 응한 것은 부시 대통령이 제안한 종전선언을 달성하기 위한 징검다리로 남북 정상회담을 활용할 가능성도 고려했을 것이다. 북한은 부시 행정부 임기 내에 북·미 적대관계 해소를 위한 의미 있는 진전을 이루기 위해 우선 남북 정상회담에서 평화 관련 합의를 도출해 당사자 해결 의지를 확인하고, 미국을 포함하는 3자 정상회담, 또는 중국을 포함하는 4자 정상회담 등을 통해 종전선언을 하려는 큰 그림을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국전쟁 종료 선언이 이뤄질 경우 북한은 부시 행정부 임기 내 북·미 적대관계를 해소하고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나와 개혁·개방을 본격화할 가능성이 높다.

김정일 위원장은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세계를 향해 ‘불량국가 지도자’에서 ‘정상국가 지도자’로 이미지 변신을 위한 연출을 시도할 것이다. 미사일 시험발사와 핵실험이란 충격요법을 통해 국면을 전환한 북한 지도부는 정상회담을 통해 북·미 적대관계 해소가 이뤄지면 핵 폐기를 할 수 있다는 ‘전략적 결단’을 확인할 가능성이 있다. 북·미 관계 급진전에 따른 우리 정부의 주도권 상실 우려 등을 불식하기 위해서는 10월 초로 예정된 남북 정상회담을 잘 준비하고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 해결구도를 마련하는 데 주력해야 할 것이다.

고유환 동국대 교수·북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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