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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 이젠 개혁할 차례다/한국불교에 「봄」은 오는가/이은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종회 없애고 「지방자치식」 강구/정치승려 「권·불 유착」 악습 일소
불교경전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떤 사람이 들판을 지나다 사방에서 불길이 솟아올라 화염속에 포위되고 말았다. 이때 미친 코끼리 한마리가 사납게 덤벼들어 도망을 치다가 마침 큰 나무 한그루를 발견,나무로 올라가 얽혀있는 칡덩굴을 잡고 매달려 위기를 모면했다.
나무 아래에는 깊은 우물이 있고 그 우물안에는 사람이 떨어지면 잡아먹으려고 기다리는 이무기 세마리가 있었다. 또 우물가에는 큰 뱀 네마리가 사람냄새를 맡고 잔뜩 노려보고 있다.
그런데 양손에 잡고 있는 칡덩굴은 흰쥐와 검은쥐가 교대로 갉아먹고 있어 얼마 안있으면 떨어지고 말 지경이다. 이때 나무에 뚫린 구멍에서는 벌이 쳐낸 꿀방울이 똑똑 떨어졌다. 이 위급한 상황에서도 그는 꿀을 받아먹는 재미에 빠져 두려움을 잊은채 매달려 있다.』
세속 중생의 삶을 묘사한 「안수정등」이라는 불가의 비유다. 비유는 불=생로병사의 욕화,우물=황천,코끼리=살귀,나무=사람의 몸,칡덩굴=사람의 목숨,흰쥐와 검은쥐=해와 달(세월),세마리 이무기=탐·진·치 삼독,네마리 뱀=지수화풍,꿀=오욕악(재물·성욕·명예·음식·수면)을 뜻한다.
○소장승려들 저력
보름동안이나 세상을 떠들썩하게한 불교 조계종 사태가 마침내 서의현 총무원장의 사퇴로 수습됐다. 13일 새벽 서 원장측 승려들이 총무원을 빠져나가고 경찰도 철수한 가운데 개혁파측 승려들이 종권의 상징인 총무원청사를 접수함으로써 옆길로 빠져나가 있던 종권분규 국면을 완전히 쓸어내 버렸다.
이로써 조계종단은 서 원장의 8년동안 전횡과 3선 연임 탐욕­개혁파 승려들의 반대­폭력사태­전국승려대회­종단 양분 등으로 이어진 분탕질을 씻어내고 종단의 구심사찰인 조계사를 새삼 청정도량(도장)으로 가꿀 수 있는 개혁과 일신의 계기를 맞았다.
결국 해냈다. 왜곡된 불법을 바로잡고 건전한 사회상식을 저버리지 않는 불가의 동사섭이 승리한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불도가 가진 파사현정의 힘은 위대했다.
이러한 힘은 선방 수좌들과 강원생들이 그 핵심을 이뤄오면서 한국불교의 「저력」으로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강한 지도력 필요
이번 사태를 개혁파의 승리로 결말낸 것도 바로 전국선방 수좌들과 강원생들의 순수하고 열정적인 발심이 밀알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
흔히 한국불교를 썩은 고목으로 비유하지만 그 뿌리는 몇백m를 뻗고 있어 끊임없이 새순을 내며 마지막 고사지경에서는 유감없이 그 저력을 발휘해왔다.
개혁파 승려대회가 종정 불신임,서 원장 치탈도첩(승려자격 박탈) 및 모든 공직박탈 등을 결의하는 과격성(?)까지 보였던 점은 다소 아쉬운 감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서슬퍼런 일제하에서도 몇몇 악독한 친일승들을 북을 지워 두드리며 파문시킨 「산문출고」의 예가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이해할만하다.
이제 조계종단은 소장승려들의 불법을 제자리에 돌려놓겠다는 순수한 구종의지가 또다시 일부 정치승려들에게 오염돼 왜곡되지 않도록 경책하면서 일대 개혁을 추진해 나가야 한다. 따라서 과도적인 개혁체제는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원로스님이 이끄는게 바람직하다 하겠다.
○과거는 묻지말자
우선적인 개혁과제는 교구본산제 실시 등을 통한 종권구조개편,종회제도의 해체,이판(수행승)­사판(교화승)으로 나누는 승단구성의 이원화 등을 손꼽을 수 있다. 이같은 구조적 개편과 제도개혁에는 고질적인 종권분규에 한 몫을 해온 세속 국회제도를 모방한 종회제도가 과연 바람직하며 타종교에 그런 예가 있는지 등을 감안,원로­중진회의 등으로 대체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지방자치화 시대라는 세속 시류의 흐름을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과도체제의 혁명적 과업들이 완수되면 참신한 중견승려들이 종단을 이끌면서 포교·교육·역경 등의 종단 근본과제를 풀어나가는게 어떨가 싶다.
50년대 대처승 정화불사 때부터 스며든 승단의 폭력풍토와 유구한 역사적 맥락을 가진 정치승려들의 정경유착 악습도 이번 기회에 말끔히 청산돼야 한다. 한국불교의 성쇠와 개혁의 핵심이 여기에 있다.
이제 4월보름 이전의 과거는 묻지 말자. 불법에 따른 푸른개혁의 물결이 흘러넘치는 날들이 와야 한다.
조계종의 4월보름 이후는 「날마다가 좋은 날」(일일시호일)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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