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원 박사의 영어 자연학습법] High Pitch(억양)를 살려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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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과부터 밝히자면 놀랍게도 세 아이 모두가 성공적으로 영어를 배웠다. 2년 6개월 내지 3년 만에 또래 미국 아이들과 거의 동일한 수준의 영어를 말할 수 있게 됐다.

 세 아이의 영어학습 과정을 지켜보며 이를 ‘자연학습법’이라고 정의했다. 주어진 상황에 맞는 영어를 구사하며 영어를 모국어처럼 자연학습하는 것이다. 반면 국내 영어 교육이 실패하고 있는 이유는 무조건 글자 그대로 암기하면 된다는 식의 ‘영문복사법’ 때문이다. 자연학습의 본능을 살리지 못하는 공부법이다.

 얼마 전 중학생 자녀를 둔 엄마가 종이와 펜을 들고서는 필자를 찾아왔다. 자녀가 ‘영어 단어의 음절을 어떻게 나누느냐’고 묻더라며, 답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한마디로 ‘Banana’가 몇 개의 음절로 되어 있느냐는 것이었다. 음절이란 ‘소리의 마디’란 뜻이니까, ‘Banana’는 3음절이라고 설명했다. 글자를 보지 말고 소리를 내어보면 대개 몇 ‘마디’인지 구별이 된다. 이번엔 내가 그 학부모에게 바나나의 강세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더니 두 번째 음절에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소리 내어 발음해보라고 했더니 세 음절을 똑같은 억양으로 밋밋하게 말했다. 머릿속에 외우고 있는 강세와 실제 발음이 다른 것이다.

  물론 ‘바나나’는 외래어이기 때문에 우리말로 사용할 때는 그렇게 발음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들은 [브 나 느]라고 발음한다. 강세가 있는 ‘-나-’를 길고 높고 분명하게 소리 내면서, 앞과 뒤의 [바-]와 [-나]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힘을 빼고 짧게 [브 나-느]하고 얼버무리는 것이 바른 발음이다.

  이 강세는 한 단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 토막말이나 한 문장에도 똑같이 있다. 그것을 High Pitch(억양)라고 한다. 말을 주고받을 때는 High Pitch로 뜻을 주고받는다. 꼭 강조해야 할 단어는 High Pitch를 살려서 표현하고, 나머지 말들은 마치 우리가 듣기에는 우물우물 얼버무리는 것처럼 발음하는 것이다. 중요치 않은 말까지 또박또박 발음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High Pitch를 살리지 못하면 대화를 매끄럽게 진행하기 힘들다. 심할 경우 외국인들이 알아듣지 못하기도 한다.

  세 아이들이 미국에서 영어를 배우는 과정만 봐도 아이들이 가장 먼저 터득하는 것이 바로 High Pitch였다. 비록 아는 단어가 많지 않고 문장으로 얘기할 수준도 아니었지만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미국인들의 High Pitch를 흉내 냈다. 미국에 온 지 몇 주가 지나자 아이들은 한마디를 들으면 단어 개수와 상관없이 문장 전체를 한 단어로 알고 말했다. 이때도 High Pitch를 분명히 살려서 발음을 했다.

  High Pitch가 바로 영어의 생명이다. 그런데 보통 한국인들은 이를 살리지 못한다. 대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머리로는 단어나 문장의 강세를 정확히 알고 있지만 소리 내어 말해보라고 하면 언제나 High Pitch는 사라지고 말았다.

 

그렇지만 영어라고는 ABC도 모르고 미국에 간 세 아이의 귀에는 High Pitch가 전부였다. 단어 하나하나를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High Pitch가 있는 소리만은 빠르게 포착해서 배우고 있었다. Excuse me도 ‘-큐즈미’로 알아듣고, It’s wrong도 ‘-스롱’으로 알아듣는다. 모두 High Pitch를 살린 예들이다. 그렇게 해서 말하기를 배운다. High Pitch를 의식하고 따라 할 수 있는 것은 영어 성공의 출발점이다.

 
김병원 전 포항공대 교수·『영어 자연학습법』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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