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뇌 속을 손금 보듯 … 37. 휴스 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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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UCLA 이야기가 나왔으니 내친 김에 휴스(사진) 교수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면 좋겠다.

“조 교수, 당신이 제안한 PET를 개발하면 어떨까. 내가 전적으로 밀어줄 테니까 한번 나하고 같이 해보자고.”

1973년 하반기께인 것 같다. CT를 수학적으로 설명한 뒤였다 UCLA 방사선의학과 물리파트의 총책임자였던 휴스 교수가 저녁에 우리 집에까지 찾아와 앞으로 같이 해보자고 사정했다. 그는 내가 개발하려는 PET 개발에 한 발을 걸치고 싶은 것 같았다. 물론 그가 연구비를 따다 줬지만 PET에 관한 지식이 거의 없는 그와 함께 일하기가 싫어졌다. 그때만 해도 내가 너무 순진했던 것 같다. 이에 앞서 학교 측에서 그같은 제의를 해왔길래 거절했던 터였다. 그래서 그가 밤에 내 집까지 찾아 온 것이었다. 그는 미국의 제너럴 일렉트릭(GE)의 수석연구원을 지내다 UCLA로 왔다.

예서 박사는 그와 사이가 벌어져 벌써 버클리대학으로 자리를 옮긴 뒤였다. 그런 판에 나까지 연구에 끼워주기 싫다고 하니 그의 마음이 더욱 다급했던 것이다.

 그와 사이가 벌어진 것은 연구력이 나와 많이 차이가 나기 때문이었다. 나는 누구를 등에 업고 다니면서까지 연구를 할 처지가 아니었다. 결국 휴스 교수는 혼자의 길을 가야 했다. 그와의 앙금은 꽤나 길게 갔다. 휴스 교수는 내 연구 덕분에 시카고에 있는 한 기업체에 CT에 관한 자문을 해주고 1년에 10만 달러를 벌기도 했던 사람이다. 그렇게 둘이서 기업체 자문을 하면서 다닐 때까지는 서로 사이가 좋았다.

75년 내가 PET를 개발하고 나서 2~3년이 지났을 때였다. 나와 PET 개발을 놓고 경쟁을 벌인 워싱턴대학의 터 포고시안 교수 밑에서 포스닥 과정을 밟던 팰프스 박사가 UCLA로 스카우트되어 왔다. PET 전문가인 내가 있는데 또 다른 PET 전문가를 영입한 것이다. 정치력이 뛰어난 휴스 교수와 팰프스 박사 등으로 나는 사면초가였다. 나에 대한 견제는 더욱 심해졌다. 내가 하는 일에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험담을 하고 다녔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좀 싫었더라도 휴스 교수를 끼워줬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렇다고 후회를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하기 싫은 것은 억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내 스스로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 성격은 지금도 여전하다. 어떻든 휴스와 팰프스 교수와 관련된 여러 가지 일이 겹쳐 다른 대학으로 떠나는 것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10년 전께 LA 근교에 사는 휴스 교수를 만난 적이 있다. 은퇴해 편안한 여생을 보내고 있는 그의 집으로 찾아갔었다. 휴스 교수는 그때의 서운함은 다 털었다고 말했다.

나는 매사를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이다. UCLA의 푸대접으로 다른 대학으로 옮기긴 했지만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 위안을 삼았다. 실제로 UCLA를 떠난 뒤에 나는 영전에 영전을 거듭했고, 연구력도 한층 성숙해졌다.

조장희 <가천의대 뇌과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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