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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조백일장] “인생이 볼품없게 느껴질 때 시조가 버팀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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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8월 장원 문선비씨

글을 쓰고 싶을 ‘때’가 있을까. 글이란게, 시란게 업이 되면서 ‘때’를 기다리는 게 한가한 얘기처럼 들리지만, 글이란 본래 가둬두고 삭히며 길어올려야 깊어지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때란 대개 생의 고비에서 표출되곤 한다. 이달 시조백일장 장원을 차지한 문선비(47·사진)씨가 그랬다. 그는 바닥까지 자신이 떨어졌다고 느끼는 그 순간,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무언가를 글로 잡아챘다.

“지난해 추석때 쯤이었어요. 오래동안 다닌 회사(중소건설업체)로부터 ‘나가라’란 통보를 받았습니다. 앞이 캄캄했죠. 아파트 입주해야지, 큰 놈은 대학가야지, 연말 연시에 나갈 돈은 많지…. 제 인생이 참 볼품 없구나 느껴졌습니다. 그때 문득 신발장에 있던 낡은 구두가 눈에 들어왔어요.”

그에게 구두는 단순한 신을 거리가 아니었다. 찌들대로 찌든 일상을 가장 먼저 드러내는 삶의 표상이었다. 시조 ‘아버지 구두’는 그렇게 탄생했다. ‘빛바랜 시간도 함께 고즈넉이 쌓여 있다’는 표현처럼 그는 구두를 통해 자신의 초라한 삶을 위로받고자 했다.

문씨의 시조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자신에 대한 어설픈 연민이 아닌, 모든 이들이 누구
나 갖고 있는 실존적 문제로 확장시켰다. 그 매개체는 아버지였다.

“제 아버님은 공무원으로 한 평생을 보내셨죠. 아시잖아요, 공무원이 얼마나 쳇바퀴 돌 듯 반복적인 삶을 사시는지. 제가 아프니 아버님 역시 얼마나 고된 삶을 사셨는지 새삼 깨닫게 된 거죠.”

그래서 구두의 ‘잔주름살’은 그에겐 보듬어주어야 할 삶의 기록이자 ‘여정을 마친 표정이 한지처럼 따스한’ 무언가로 다가올 수 있었다.

문씨는 공업고등학교를 나왔다고 한다. “인문계를 나오지 않은 게 콤플렉스였지만 그래서 더 오기를 부렸다”고 털어놨다. 시는 어린 시절부터 끄적거렸고, 시조와 만나게 된 것은 6년전부터. “저에게 시조는 버팀목입니다. 엉뚱한 데로 눈 돌아가려 할때마다 마음을 잡아주곤 했죠. 늦바람 불었지만 꿋꿋이 정진해 나가겠습니다.”

최민우 기자

심사위원 한마디
내면 풍경 드러내 공감 자아내야

30도를 웃도는 폭염인데도 하늘을 올려다보니 부쩍 높아진 거리감이 성큼 다가선 가을을 느끼게 한다. 이 계절에도 끊임없는 관심으로 많은 작품을 보내주신 이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다만, 이미 다른 지면을 통해 등단한 이들이 응모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는 시조의 앞날을 위해서도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시조백일장’이 순수한 아마추어의 무대란 점을 상기해 주기 바란다.

아직도 적지 않은 작품들이 고투에서 벗어나지 못한 점도 불만이다. 예를 들면 ‘여백에 솟은 관악 청록이 소식이라’, ‘소쩍새 풍년가를 불러주는 농촌마을’, ‘벌 나비 꽃을 찾아 들과 산을 날아오면’ 따위다. 낡고 상투적인 상념에서 벗어나 화자의 내면 풍경을 보여주는 심상을 채용하도록! 감각의 더듬이를 곧추세울 일이다.

그런 점에서 장원으로 뽑은 문선비 씨의 ‘아버지 구두’는 단연 돋보인다. 녹록하지 않은 일상에 부대끼고 상처 입은 영혼을 위무하면서 삶에 대한 자각과 대응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흔한 소재를 통해 아버지의 ‘빛바랜 시간’을 그려내는 시선이 ‘한지처럼 따스하’게 묻어난다. 특히 둘째 수의 밀도 있는 표현들이 공감을 자아낸다.

연선옥 씨의 ‘숨 쉬는 돌’도 육친의 정을 노래한 작품이다. ‘미륵사지’와 ‘징검다리’를 통해 아버지의 ‘어깨’와 어머니의 ‘한 평생’을 건너다보는 것이다. 비유의 접근이 참신하다. ‘어머니, 냇물에 앉아 잠들지 못한 한 평생’은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표현이다. 하나 제목이 정채봉 동화의 ‘숨 쉬는 돌’과 같아서 신선한 맛을 더는 느낌이다.

박신산 씨는 여러 편을 응모했는데 수준이 고른 작품들이었다. ‘옛 둑에서’는 시조에서 되도록 피해야 할 과거 회상 구조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소나기 튀다 멎는 곳, 토란잎들 서늘하다’처럼 언어의 생동감을 살려내는 표현들이 오랜 습작을 짐작케 한다. 말 다루는 역량이 그만큼 익어 있다는 말이다.

시를 고르고 제자리에 앉히는 일은 실로 어렵고 어려운 일임을 새삼 실감하며, 김혜승·조민희·최은옥·노을·서상희(고3) 제씨의 작품을 아쉽게 놓는다.

<심사위원: 이정환·이승은>

◆응모안내=매달 20일 무렵까지 접수된 응모작을 심사, 매달 말 발표합니다. 응모 편수는 제한이 없습니다. 매달 장원·차상·차하에 뽑힌 분을 대상으로 12월 연말장원을 가립니다. 연말장원은 중앙신인문학상 시조 부문 당선자(등단자격 부여)의 영광을 차지합니다. 장원·차상·차하 당선자에겐 각각 10만·7만·5만원의 원고료와 함께 『중앙시조대상 수상작품집』(책만드는집)을 보내드립니다. 응모시 연락처를 꼭 적어주십시오.
 
◆접수처=서울 중구 순화동 7번지 중앙일보 문화부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100-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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