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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폭동」이 「항쟁」인가(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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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역사적 평가란 역사적 고증이라는 철저한 과정을 거친 다음 이뤄진다. 역사적 고증이란 객관적 사실 확인과 인과관계에 대한 포괄적 연구를 통해서 이뤄진다. 과거 사실이 진실로 어떠했던가를 찾는 일이 역사가의 첫 작업이다. 이 작업을 토대로 해서 역사가는 평가해야 한다. 평가가 앞서는게 아니라 진실에 가까이 가려는 작업이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역사교과서 개정작업을 벌이고 있는 학자들의 논의과정을 보노라면 과연 이런 역사적 고증이 제대로 이뤄졌는지 의심스럽다. 96년부터 중·고생들이 사용한 국사교과서중 현대사 부분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하고 평가하자는 의도는 물론 좋다. 그러자면 새로운 시각만이 중요한게 아니라 그 시각과 평가를 뒷받침할 역사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왜 4·19가 의거만이 아닌 혁명이어야 하고,5·16은 혁명 아닌 군사쿠데타여야 하는가를 사실 확인을 통해 제시해야 한다. 그것이 한낱 전공자의 논문이 아니라 교과서에 실린다면 많은 사람들이 납득하고 인정하는 객관성을 획득해야 한다.
단지 권위주의시절에서 문민정부로 이행했다는 시대분위기 하나만으로 혁명이 쿠데타가 되고,폭동이 항쟁으로 바뀌는 유행성·일과성 작업이 역사가들이 할 일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런 평가가 자연스레 내려지게끔 역사연구의 성과가 비례해서 이뤄졌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 현대사 연구는 젊은 연구자들의 정력적인 노력에 의해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그 성과를 그대로 교과서에 실을 만큼 객관화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우선 그 대표적 사례가 「대구 10·1폭동」을 「10월항쟁」으로 수정한 부분이다. 과거 냉전적 시각에서 좌익이 사건 발단을 제공했다는 관점만 부각시켜 참여 민중을 폭도로 모든 잘못을 시정한다는게 그 이유다. 과연 그런가. 원래 46년 10월1일 공산당의 지령과 선동으로 대구지방에서 일어난 대폭동을 대구폭동사건이라고 불렀다. 이 사건의 배경은 미군정의 실정을 틈타 공산당이 벌인 9·24철도파업과 맥락을 같이하면서 대구노동평의회가 주동이 되어 파업을 주도하고 선동하는 과정에서 경찰과 충돌한 사건이다. 멀리는 공산당과의 투쟁이고,가까이는 경찰과 파업주도 선동세력과의 대결이었다. 이를 과연 민주화 항쟁이라는 의미의 「항쟁」이라는 용어를 붙일 수 있는가. 붙일 수 있다면 그에 상응하는 반대 고증이 있어야 하고,또 그 고증이 많은 사람들의 합의를 거쳐야 할 것이다. 역사적 작업이나 합의과정없이 단순히 좌우 대결을 모두 민족운동 또는 항쟁으로 보는 시각은 매우 위태로운 역사시각인 동시에 그 수정작업 또한 국민적 합의를 도출할 수 없는 매우 즉흥적인 자세라고 본다.
아직은 시안단계이니 많은 토론과 조정의 과정을 거쳐 올바른 평가가 내려지기를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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