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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호기자의문학터치] 21세기판 저주받은 걸작에 대하여 <10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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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저주받은 걸작’이란 어느 비평가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적어도 이 단어를 사용하는 주체는 교체되어야 한다. 소수의 비평가 집단에서 일반 대중으로. 심형래 감독의 영화 ‘디 워’를 둘러싼 논쟁을 보며 든 생각이다.

이번 논란의 핵심은 의외로 간단하다. 23일 열린 토론회에서 비평가 진중권은 “문근영이나 이나영 보겠다고 영화를 보러 가긴 하지만 그걸 가지고 평론하거나 평점을 줄 수는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게 바로 정답이다. 같은 시각 같은 극장에 앉아 있어도 비평가와 대중의 동기와 목적은 다르다. 하여 반응도 당연히 다르다.

비평가에게 예술작품은 텍스트다. 텍스트이므로 그들은, 학생이 교과서 공부하듯이 영화를 분석하고 소설을 해부한다. 한 번은 문학평론가의 노트를 구경한 적 있다. 그 노트엔 한 단편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의 캐릭터와 관계가 설계도면 마냥 촘촘히 그려져 있었고, 어구 하나하나를 옮겨놓은 바로 아래엔 깨알 같은 해설이 달려있었다. 그게 그들의 업이다. 다시 말해 벌이의 수단이다.

하나 대중(Mass)에게 문화는 소비의 대상이다. 문근영이 나와서 또는 컴퓨터그래픽이 그럴싸해서, 아니면 작정하고 울어 보려고, 이도 아니면 소일삼아, 그들은 영화를 보고 소설을 읽는다. 전문가 버금가는 매니어도 물론 있다. 그러나 매니어란 말 자체엔 아마추어란 개념이 포함돼 있다. 먹고사는 일이 아니므로 매니어의 작업은 일종의 유희다.

마침 계간문예지 ‘문학수첩’ 가을호가 흥미로운 특집을 실었다. 김훈·공지영·류시화·하루키의 문학이 왜 인기인지를 ‘이 작가는 왜 읽히는가’란 제목 아래 조명했다. 찬찬히 읽어봤지만 ‘이 작가는 왜 읽히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은, 글쎄다… 훈계 조의 몇 말씀만 눈에 띄었을 뿐 잘 보이지 않았다. 대신 기획의 취지는 충분히 공감했다.

앞서 언급한 넷 중 공지영과 류시화는, 대중의 지지가 무색할 만큼 비평과 사이가 나쁘다. 이에 대해 공지영이 진작에 한 말이 있다. “그들로 하여금 떠들게 하라. 난 내 길을 가겠다.” 이런 식의 대응은 젊은 작가들에게서도 종종 발견된다. 개중 한 신예작가의 재치 어린 화법이 기억에 남는다. “지젝이고 라깡대는 소리.” ‘지젝’과 ‘라캉’은 현재 한국 비평이 가장 자주 인용하는 소위 ‘주석용 학자’다. 마치 ‘지껄이고 깡깡대는 소리’처럼 들린다. 일찍이 평단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보였던 박민규가 자신의 SF소설 ‘깊’이 올해 황순원문학상 최종심에 오르자 “왜들 이러셔”라고 대꾸한 것도 인상적이었다.

비평 작업을 깎아내릴 의도는 전혀 없다. 다만 비평을 거치지 않고도 대중과 바로 교류하는 문화상품이 늘고 있음을 지적할 따름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문화상품’이란 용어다. 혜택받은 소수만이 문화를 향유하던 시절은 지났다는 걸 ‘문화상품’은 스스로 증명한다. 한 문학평론가의 고백이 떠오른다. “박민규는 비평을 통하지 않고 독자와 직접 접촉한 문학에서의 첫 사례다.” 공지영이나 류시화, 나아가 ‘디 워’도 별반 다르지 않을 터이다.

한 과학자가 실험실에서 엄청난 발견을 했다 치자. 관련 계통에선 위대한 업적이겠지만 대중에겐 그저 “So what(그래서 뭐)?”의 문제다. 마찬가지로 비평 언어는 애초부터 대중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비평은 각 장르 안에서 엄연한 학문이다. 문화 유통업자들이 비평의 권위를 빌릴 뿐이다. 그러니 너무 몰아붙이지 말자. 세상은 이미 변했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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