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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후보 이명박 기업인의 평가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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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매우 까다로운 사람이다. 사람을 쓸 때도 그랬다. 이명박은 그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대단한 사람이라고 봐야 한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사석에서 한 말이다. 이 후보는 현대그룹 재직 시절 정 명예회장의 총애를 받으며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평사원으로 입사한 지 12년 만인 36세에 현대건설 사장에 발탁됐고 이후 10개 계열사의 대표를 겸임했다. 정 명예회장은 ‘영(英)’자 돌림의 친동생들에게조차 주지 않았던 파격적인 보상이었다. 재계에서 ‘최고경영자(CEO) 이명박’을 평가할 때도 정 명예회장에 대한 언급은 빠지지 않는다. 다른 걸 다 떠나서 그의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기업인으로선 ‘보증수표’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얘기다. 한편에선 “너무 아는 것도 부담”이라거나 “과도한 기대는 금물”이라며 신중론을 펴기도 한다. ■ 왕회장의 ‘보증수표’=정 명예회장은 이 후보를 상대로 마치 시험을 치르듯 다양한 역할을 맡겼다. 인천제철을 인수하자마자 ‘점령군’으로서, 한국도시개발·현대자원개발 등 갓 설립한 회사는 ‘셋업(setup)맨’으로, 노사분규가 극심했던 현대엔진에는 ‘해결사’로서 그를 보냈다. 이 같은 굳은 일을 그는 깔끔하게 처리했다. ‘정 명예회장의 신뢰가 먼저 있었다기보다는 그가 먼저 그만한 신뢰를 줬기 때문이라는 게 현대그룹 전직 임원의 평가다. “새로 인수한 회사나 신사업을 맡으면 대표이사가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간여를 해야 한다. 그런 일을 오너가 하지 않고 이 후보에게 겸임시켰다는 것은 그 사람을 완전히 믿었다는 뜻이다. 그때마다 이 후보는 주어진 미션을 깔끔하게 매듭지으면서 왕회장(정주영 명예회장)의 기대에 부응했다.” 이런 신뢰는 정 전 회장을 빼닮은 그의 리더십과 추진력에서 비롯됐다. ‘샐러리맨의 신화’로 불린 그였지만 경영 스타일은 ‘오너형’에 가까웠다. 현대건설의 한 전직 임원은 이를 두고 “(이 후보가) 한번 말하면 당연히 따라가야 하는 걸로 알았다. 사실 따라갔다기보다는 끌려갔다는 말이 더 정확하다”고 했다. 그는 이어 “수주 전쟁 때마다 이 후보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우리가 먹어야 해. 그카는 것밖에 다른 수가 없어’라고 말하곤 했다”며 “사투리만 차이가 났을 뿐 정 전 회장을 판에 박은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타 그룹의 평가도 비슷하다. “현대가 편한 직장이 아니다. 윗사람 눈치도 많이 보는 편이고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는 스트레스도 심하다. 그런 곳에서 성과를 올리면서 오너를 상대로 자기 목소리를 냈다면 능력 검증은 됐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두고선 현대 출신들 사이에서도 평가가 엇갈린다. 여기에는 ‘목표지향형’ 인물들이 흔히 듣게 되는 ‘후덕하지 않다’ ‘아랫사람을 챙기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왕회장과의 결별도 이런 부정적인 시각에 영향을 줬다. 정 전 회장이 1992년 국민당을 창당, 대선 후보로 나서자 이를 말리던 이 후보는 상대편인 신한국당에 투신했다. 자연히 현대 내에선 “30년 넘게 키워준 주군을 배신한 배은망덕한 사람”이라는 말이 나왔다. 정 전 회장도 섭섭함을 직·간접적으로 표시하기도 했다. 두 사람의 찰떡궁합을 깬 것은 사업이 아니라 정치였다. 하지만 ‘조직에 대한 충성’과 ‘업무 능력’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게 한국적인 경영환경이라 당시의 일은 재계 내에서 여전히 평가가 분분하다. 이 후보는 17일 정 명예회장의 부인 변중석 여사의 상가에 일찌감치 모습을 나타냈다. 하지만 상주인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과 의례적 인사만 주고받았을 뿐 별다른 대화를 하지 않았다. 현대 출신의 한 인사는 “정 명예회장의 아들들은 특히 아버지를 배신한 사람으로 아직도 앙금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들 사이가 언제까지나 냉랭하지는 않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명분보다 실리를 따지는 게 기업인”이라며 “추이를 봐가며 화해 국면으로 진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 기대와 경계 사이 관망 중=차기 대통령에 대한 재계의 바람은 이른바 ‘경제 대통령론’으로 모인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친(親)기업 성향의 대통령’이다. 특정 후보를 지지해서라기보다는 현 정부의 노동계 감싸기, 규제 남발, 잦은 정책변경 등에 대한 반발감에서 비롯됐다는 게 기업 관계자들의 주장이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적어도 ‘가진 게 죄’라는 식의 분위기는 누그러질 것 아니냐는 점에서 이 후보에게 기대를 갖는 건 사실”이라고 했다. 또 다른 대기업 관계자는 “반기업 성향 정권의 ‘3연임’은 반드시 저지해야 한다는 게 재계의 현재 컨센서스”라고 했다. 기업 마인드에 입각한 과감한 정부 개혁을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이익을 못 내면 망하는 게 기업이다. 그래서 기업인은 마치 본능처럼 원가와 효율을 따진다. 그런 사고에 능숙한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면 지금의 정부가 어떻게 바뀔지 한번 상상해 보라. 엄청난 변화가 오지 않겠는가.” 효율과 수익을 추구하는 행정스타일은 서울시장 시절 일찌감치 선을 보이기도 했다. 청계천 사업은 ‘주식회사 서울시’가 최소 투자로 최대 효과를 올린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그는 서울시가 관리하던 각종 기금 운용을 외부 금융전문가에게 맡겨 수익률을 높이기도 했다. 하지만 ‘기업인 출신=경제 대통령’에 동의하기 힘들다는 시각도 있다. 한 대기업 CEO는 사석에서 “대통령은 원칙을 세우고 정치적 판단을 할 뿐 세세한 경제 문제는 관료들에게 맡기면 된다”면서 “대통령이 시시콜콜 간여하기 시작하면 또 다른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입버릇처럼 말한 “경제는 내가 몰라서 잘 돌아갔는데, 군은 내가 많이 안다고 나서서 제대로 발전시키지 못했다”는 회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 후보도 자신감이 과도해 자칫 독주할 수 있다는 우려다. 개발시대에 형성된 리더십이 여전히 통할지 의문을 표시하는 시각도 있다. 한 대기업 임원은 “그가 CEO로 활약하던 때와는 경제 환경이 크게 변했다”며 “그때처럼 기업과 정부가 어깨 걸고 ‘으쌰으쌰’ 한다고 단숨에 경제가 살아날 수 없다는 걸 기업에 있는 사람들도 다 안다”고 주장했다. 경선과 달리 본선에서는 노동계·서민층 표를 의식한 공약들을 대거 등장시킬 가능성에도 재계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기업은 “관망 중”이다. 여권 주자도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섣불리 의견을 드러냈다간 감당할 수 없는 정치적 리스크를 겪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한 대기업 오너 경영자는 “앞으로 4개월은 4년 같을 것”이라고 표현했다. 업계 관계자들은 또 “지금은 (정부에) 줄 것도 받을 것도 없는 시대”라며 “상당수 대기업이 글로벌 기업화한 만큼 대선이 예전만큼 기업 활동에 큰 변수는 아니다”고 했다. 그렇다고 마냥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한 재계 관계자는 “모 그룹에서는 경선 직전 박근혜 후보가 약진하고 있다는 정보가 전해지자 즉각 이 후보와 박 후보가 당선됐을 때를 가정한 보고서를 작성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귀띔했다. 조민근 기자 jming@joongang.co.kr 중앙SUNDAY 구독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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