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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엄한 자연 앞에 예술은 그저 모방일 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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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2006년 여름, 김형국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여행 길라잡이를 자처했다. 한국 미술계의 노장인 수암(瘦岩) 한용진, 우현(牛玄) 송영방, 별악(別嶽) 김종학 세 벗의 미국 국립공원 탐방길에 앞장선 것이다. 미술 사랑이 지극한 김 교수가 이들과 함께 미국 몬태나주의 글레이시어, 캘리포니아주의 요세미티 국립공원을 돌아본 여행기를 싣는다. 글 김형국(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이런저런 인연으로 십여 차례 미국 국립공원을 탐방하는 사이에 그 압도하는 선경(仙境)을 대할 때마다 이런 경관은 누구보다 조형예술가들이 마땅히 만나야 할 곳이라 싶었다. 조형예술이란 자연에 다가가 그걸 닮고 유감(有感)유감(類感)하려는 몸짓이라 하지 않던가.

조형예술가의 자연 공부는 우리 동양 쪽 사유가 심오했지 싶은데, ‘동양화란 바위와 물과 나무를 그리는 작업’이란 간명직절한 정의는 설득력이 있다. 이미 세상이 알다시피 일행 가운데 수암은 바위 덩어리를 다듬는 조각가요, 우현은 바위와 물과 나무가 어우러진 강산의 아름다움을 종이에 옮기는 수묵화 전공이며, 별악은 천지조화의 산물인 초목 생장의 극상(極相) 꽃을 집중적으로 그리는 서양화가다.

한용진·송영방·김종학 삼인은 이미 2001년에 오랜 지우를 확인하는 삼인전을 열었을 정도로 서로 단짝들이다. 이분들을 내가 반한 국립공원으로 모시고 싶었다. 특히 돌 다루는 일로 반생을 보낸 수암에게 어느 곳보다 꼭 요세미티를 보이고 싶었다. 공원 중심에 돌고래 머리처럼 치솟은 여성적 아름다움의 거대한 바위산 하프돔, 직벽(直壁) 바위를 내보이고 있는 남성적 아름다움의 엘캐피탄El을 중심으로 온통 화강석 바위 덩어리로 가득찬, 골기(骨氣) 넘치는 승지(勝地)는 내 경험으로 요세미티만한 곳이 없지 싶었기 때문이다.

1. 김종학씨가 그린 글레이시어 국립공원 야생화 들판. 2. 3000m 높이에서 바라본 글레이시어 국립공원을 수묵담채화로 표현한 송영방씨 작품. 3. 한자리에 모인 세 친구. 왼쪽부터 송영방, 김종학, 한용진. 4. 조각가 한용진씨의 스케치.

빙하공원 종주기
글레이시어 국립공원은 높이 3000m급 봉우리들이 원시시대의 빙하를 머리에 이고 있다 해서 ‘빙하 국립공원’이라 이름 붙은 곳이다. 탐승객이 누리는 이곳 경관의 절정은 설악산으로 치면 외설악 즈음에서 내설악으로 바로 관통하는, 우리 일행이 ‘향일로(向日路)’라 이름붙인 ‘고잉 투 더 선 로드(Going-to-the-Sun Road)’이다. 올라가는 길은 오른쪽이 깎아지른 절벽, 왼쪽은 천길 낭떠러지인데, 그 절벽을 끼고 형형색색으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야생 초화를 보고 있노라면 세상에 천당이 있다면 바로 이곳일 것이라는 믿음이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이곳 국립공원 초화는 5월 중순부터 산 아래의 아(亞)고산대에서 피기 시작해 8월에 산 중턱에 이르면 한 시즌이 끝난다. ‘향일로’는 옛적에 이곳에 살았던 인디언들이 왕래했던 길이다. 이 길로 고산을 향해 굽이굽이 돌아 올라가면 다시 내려가야 하는 길 갈림에 해발 2025m의 ‘로건 패스(Logan Pass)’를 만난다. 국립공원 탐방의 하이라이트로서 전형적인 고산동토대(高山凍土帶)다운 야생화 평원이 넓게 펼쳐져 있다.
고산동토대는 나무가 자랄 수 있는 수목한계선보다 높은 곳이다. 나무가 거의 없고, 대신 앉은뱅이 관목, 이끼, 풀, 야생화 차지다. 햇빛은 강렬하지만 바람이 세차게 불고 눈이 많이 내리는 혹독한 기후 탓에 평지에서 1m 정도 자라는 풀꽃도 분재를 한 것처럼 소형화된 나머지 1cm 높이에 불과하다. 어쩌다 동물이 오갈 뿐 사람 말고는 인조물이라곤 찾을 수 없다. 눈 덮인 산과 높은 하늘이 강렬한 대조를 이룬다. 자외선 방출이 평지보다 두 배나 강하기 때문에 시계는 현란하게 눈부셔, 먼 산은 훨씬 또렷하게 가까이 보이고 풀꽃은 한결 선명하게 빛난다.

세 조형예술가가 그곳 풍경을 즐기는 방식은 제각각이었다. 수암은 꼭대기가 우리 산처럼 뾰족하지 않고 마치 성을 올려놓은 듯한 넓고 펑퍼짐한 모양의 주변 산봉우리를 혼자 진지하게 마음에 담으면서 그 징표로 작은 종이에 몇 가닥 선을 긋고 있다. 별악은 ‘로건 패스’의 야생화를 바라보며 한동안 열심히 수채화를 그린다. 꽃 낱낱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야생화가 뒤덮은 초원의 분위기를 종이에 옮기는 중이다. 한편, 우현은 낙차 큰 산비탈과 계곡 물의 유현함에 넋을 잃고 있었다. 추사가 즐겨 휘호하던 ‘계산무진(溪山無盡)’의 정경이 바로 눈앞에 펼쳐지고 있으니, 그의 평소 지론인 흉중구학(胸中丘壑), 곧 가슴속으로 언덕과 계곡을 담고 있음이 분명했다.

요세미티에 푹 빠진 노동(老童)들

산불을 만나 겪어야 했던 피난생활, 일행 가운데 세 사람이 따로 산길을 걷는 사이에 새끼를 거느리면 아주 공격적이 된다는 곰 가족을 바로 눈앞에서 만나 아찔했던 순간, 그리고 신기하다고 손으로 독성 야생화를 잘못 만져 별악이 알레르기 눈병을 앓는 해프닝을 뒤로하고 요세미티로 향했다.

요세미티의 깊고 넓은 계곡, 그 위로 장엄하게 치솟은 바위 덩어리는 특히 처음 찾는 사람들에게 미국 국립공원의 장엄함을 한순간에 증명해 주는 위력이 있다. 우현은 한국 출발 패키지 관광단을 따라 공원 초입을 버스로 지나친 적이 있어 당신은 “이미 그곳을 다녀보았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사흘에 걸쳐 구석구석을 찾아들자 요세미티는 처음이라고 고쳐 말한다. 100m 가까이 자라는 지구상에서 가장 거대한 레드우드(redwood) 나무 숲, 그 나무들이 자라면서 ‘연리지(連理枝) 현상’이라고 두 나무가 가지로 서로 연결되어 마침내 한 몸으로 자라는 장관을 만나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수암 또한 마찬가지였다. 거대한 화강석 덩어리의 산들, 그 모퉁이로 뚫은 길 노견(路肩)에 양파껍질처럼 노출된 화강석 더미를 보자 “저게 바로 내 작품”이라고 탄성을 지른다.

야생 들꽃이 만발한 산중 호숫가의 화이트 울프(White Wolf)로 안내했다. 탐승객의 발길이 비교적 뜸한 이곳 호수 주변에서 야생화를 지천으로 만난 별악은 특히 감격 또 감격이었다. 마지막 행선지는 요세미티의 랜드마크 하프돔을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는 옴스테드포인트(Olmstead Point)였다. 거기 거대한 바위를 이기며 그 틈새에서 자란 나무를 껴안는 세 사람의 기쁨은 늙은 아이, 곧 노동(老童)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곳이 해발 2640m의 고지인지라 가벼운 두통의 고산증세를 느낄 만한데도 노동들은 오직 환호작약할 뿐이었다.

*세 미술가가 국립공원에서 얻은 영감으로 그리고 만든 그림과 조각전 ‘지우지예전(知友知藝展)-지난 여름 이야기’가 8월 28일부터 9월 4일까지 서울 소격동 예나르 화랑에서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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