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틋한 그 시절, 동독을 추억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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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호 05면

독일 여성 감독 볼프강 베커의 2003년 영화 ‘굿바이 레닌’은 동독 출신 알렉스의 사연이 눈물겨운 희비극이다. 때는 1980년대. 철두철미한 사회주의의 일꾼이던 어머니가 자신 때문에 쓰러지고, 모친이 혼수상태에 있던 몇 달 사이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다. 의식을 되찾았지만 쇠약해진 어머니에게 충격을 주지 않기 위해 동독이 서독에 흡수통일됐다는 얘기를 하지 못하는 아들은 여전히 동독이 우월성을 지니고 존재하고 있다는 가상현실을 만들어낸다. 어머니가 먹고 싶다는 오이피클을 찾아 헤매는 알렉스의 모습에서 우리는 ‘만약 남북이 통일된다면 혹시 저런 사연은 없을까’ 가슴이 저렸다. 아니나 다를까. 거꾸로 분단이 아닌 통일을 가장한 조명남 감독의 ‘간 큰 가족’이 나와 심심하게 우리를 웃겼던 것이 2005년이다.

1. 베를린의 한복판을 흐르는 스프레 강변에 자리한 39DDR 박물관’ 입구.2. 서랍식, 액자식 전시 작품을 살펴보는 관람객들.3. 옛 동독의 국민차로 불리던 ‘트라반트’.

통일 17주년을 바라보는 베를린시는 어떨까 궁금했다. 꽤 시간이 흘렀으니 ‘굿바이 레닌’ 같은 상황에 처한 어머니와 아들이야 없겠지 싶었다. 들려오는 소식으로는 통일 독일 사람들이 ‘오스탈지(Ostalgie)’를 앓고 있다고 했다. 동쪽을 가리키는 오스트(Ost)와 향수란 의미의 ‘노스탈지(Nostalgie)’를 더해 만든 이 조어는 옛 동독 시대에 대한 회향병을 상징하는 단어가 됐다. 과연 그랬다. 특히 동독 시절에 쓰이던 물품을 그리워하는 소비자 마음을 겨냥한 마케팅까지 나타나고 있다.
베를린의 명소인 ‘박물관 섬(Museumsinsel)’ 근처, 스프레(Spree) 강변에 사람들이 몰려든다. 보도에서 계단을 내려가야 보이는, 어찌 보면 외진 곳인데도 사람 줄이 끊이질 않는다. 유람선 선착장과 붙어 있는 건물 입구에 ‘DDR’이란 푸른색 글자가 선명하다. 여느 박물관처럼 웅장하고 고풍스럽지는 않지만 옹색하나마 모양새는 갖췄다. 이 조그마한 공간이 복닥복닥 장바닥처럼 붐비고 있는 것이다.

이름하여 ‘DDR 박물관’. 안내서는 ‘세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박물관’이라 자랑한다. 동독의 일상생활과 삶을 그대로 체험하게 꾸몄다는 문구가 또렷하다. 이제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동독 시절의 나날이 이 작은 집에 차곡차곡 쟁여져 있다는 것이다.
전시 공간은 크게 16개 주제로 나누어졌다. ‘교육’ ‘일’ ‘생산품’ ‘집’ ‘거주’ ‘가족’ ‘미디어’ ‘패션’ ‘문화’ ‘휴일’ 등이다. 각 테마에 맞는 물품과 자료가 서랍형 진열장에 들어 있다.

관람객이 가장 흥미로워하는 전시품은 동독의 국민차라 불리던 소형차 ‘트라반트(Trabant)’다. 애칭 ‘트라비(Trabi)’로 더 유명했던 이 차를 타보려고 줄을 선다. 좀 뚱뚱한 부부가 ‘트라비’에 타니 작고 가벼운 이 차가 크게 출렁인다. 동독과 서독의 패러디 같아 웃음이 나온다.
동독 중산층 가정의 거실과 부엌, 화장실을 그대로 재현한 코너는 어깨를 밀쳐야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인기다. 사람들은 동독의 텔레비전 상표인 ‘로보트론(Robotron)’에서 흘러나오는 호네커 전 동독 총리의 연설을 열심히 듣고 웃는다. 부엌 살림살이를 뒤져보는 이도 많다. 어설프고 낯선 그 물건들이 그리 신기한 모양이다.
살짝 거칠고 소박해 보이는 생활필수품 사이로 언뜻 ‘레닌 동지’의 얼굴이 지나간다. 아이들 손을 끌고 와 열심히 설명을 해주던 부모 세대는 잠시 추억에 젖은 듯 눈을 감는다.

6.16개 주제로 나눠 옛 동독의 삶을 살펴본 전시 패널.7. 옛 동독의 텔레비전 39보트론’.8. 1957년 생산된 전화기.9. ‘인터숍’에서 만날 수 있는 생활용품.10.다양한 옛 동독 디자인.11.단순하면서도 아름다운수제품으로 최근 인기를 모은 ‘일미아’ 운동화.12.DDR 뮤지엄’의 ‘트라비’.

이 박물관의 산파역을 한 로베르트 뤼켈 관장은 “과거 동독의 생활상을 보고 싶었지만 어디서도 찾을 수 없어 이 박물관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의 뜻에 동참한 수백 명의 시민이 자신이 소중히 보관하고 있던 물품을 선뜻 내놨다.
한때 동독의 일상용품을 재료 삼아 작품을 만들었던 독일 현대미술의 대표작가 요제프 보이스도 이 박물관의 모범이 됐다.
박물관을 돌아 나오며 문득, ‘언젠가 우리도 이런 박물관을 만들어야 할 때가 오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구경거리가 아닌 역사와 인류학적 연구 대상으로서의 박물관이 필요할 것이다.

를린에서 ‘오스탈지’를 달랠 수 있는 곳

■‘인터숍 2000(INTERSHOP 2000)’=‘인터숍’은 옛 동독에서 국산이나 수입품을 살 수 있던 국영판매점을 가리키던 말. 옛 동독 철도의 식당차로 쓰이던 컨테이너를 가게 삼아 DDR 시절의 각종 물건을 판다. 비누나 수세미 같은 자잘한 생활용품부터 음반이나 책 같은 문화 콘텐트까지 동독인이 보냈을 나날을 짐작해볼 수 있는 것들이다. 복고풍 감각이지만 지금 통일 독일에서 ‘DDR 디자인’이란 용어가 유행 사조가 될 만큼 연구대상으로도 의미가 있다. www.ddr-mitropa.de

■‘일미아 바이 루시드 21(Ilmia bei Lucid 21)’=옛 동독에서 생산하던 운동화의 대표 상표가 ‘일미아(Ilmia)’다. 얇은 값싼 가죽에 깔창 없이 고무판 한 장을 밑에 댄 몹시 소박한 운동화다. 단순함의 극치랄까. 그런데 지금 이 운동화가 인기다. 그 심플한 아름다움에 사람들이 열광하고 있는 것이다. 1990년대 초에 시장에서 저절로 소멸했던 이 ‘일미아’ 운동화가 손으로 만드는 수제 운동화의 명품으로 거듭났다. 한 땀 한 땀 손으로 바느질해 만드는 이 운동화의 완벽한 발 보호가 사람들을 끌어당기고 있다. www.ilmia.com

■‘오스트프로두크테(Ostprodukte)’=전철 S반 역이 있는 알렉산더 광장 지하에 있는 옛 동독 상품 전문점. ‘오스트 프로두크테’란 말 그대로 ‘동독 상품’을 다양하게 갖추었다. ‘메르헨 초콜릿’ 같은 추억의 먹을거리부터 오리지널 커피인 ‘임누 카페’ 등 옛 동독의 생활상이 물씬 풍긴다. ‘오스탈지’를 기업 전략으로 삼은 전형적인 예다. 옛 동독의 추억을 맛보고 싶은 이라면 한번쯤 들러 작은 물건 몇 가지를 사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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