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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인질의 숭고한 양보를 헛되게 하지 말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지난 12일 탈레반이 한국인 여성 인질 2명을 풀어줄 때, 인질 중 한 명인 이지영(36)씨가 자신에게 주어진 석방 기회를 다른 사람에게 양보했다고 한다. 당시 석방된 김경자·김지나씨를 인터뷰한 알자지라 방송에 따르면 “이지영씨가 자신이 아프가니스탄 경험이 많으니 나머지 인질들과 함께 남겠다며 석방을 양보하는 놀라운 희생 정신을 발휘했다”는 것이다.

납치 20일이 넘어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데다 언제 살해당할지 모르는 절망적 상황에서 실낱 같은 기회를 동료에게 양보한 것은 범인(凡人)의 상식과 의지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숭고한 희생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지영씨는 몸 상태가 아주 안 좋았다가 석방 며칠 전 가까스로 회복됐는데도 “나는 몸이 괜찮아졌으니 다른 이를 풀어주라”고 했다는 것이다. 깊은 인상을 받은 탈레반이 가족에게 편지 쓰는 것을 허락하자 지영씨는 편지에서도 “건강히 잘 있으니 걱정 마세요. 잘 먹고 편히 있어요. 아프지 마시고 편히 계세요”라며 오히려 부모를 걱정했다.

이번 사건에서는 인질 가족들 역시 끝까지 이성을 잃지 않는 성숙한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배형규 목사와 심성민씨가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을 때 유가족들은 입술을 깨물고 슬픔을 삼키며 다른 인질들의 석방만을 호소해 국민을 감동시켰다. 다른 피랍자 가족들도 국제사회에 인질 석방을 호소하는 동영상을 만들어 인터넷에 올리고 서울 주재 이슬람 국가 대사관을 방문하는 등 극도로 자제해 정부의 협상을 곤란하게 하거나 사회여론을 악화시키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이제 탈레반이 화답할 차례다. 그런 사람들이 어찌 알라의 적이 될 수 있겠나. 오히려 병을 고치거나 배움의 기회를 누릴 수 없는 당신 형제들에게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사랑을 실천하려던 젊은이들인 것이다. 코란은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 한 명을 죽이면 그것은 모든 인류를 죽이는 것이며, 한 사람을 구제하면 그것은 인류를 구제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더 이상 죄를 짓지 말고 알라의 이름으로 그들을 석방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