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아름다운 도시에 살고 싶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많은 부담이 되었지만, 큰맘 먹고 오랫동안 계획했던 가족여행을 유럽으로 떠났다. 한 집에 살면서도 식구들끼리 함께 시간을 보내기는 쉽지 않다. 여행을 하면서 하루 세끼 꼬박꼬박 함께 밥을 먹고, 구경도 하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를 좀 더 깊이 있게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름다운 추억도 많이 만들었다.

우리가 처음 도착한 곳은 체코의 프라하였다. 1346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카를 4세에 의해 만들어진 이 도시는 오늘날에도 당시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수많은 집의 지붕과 벽은 주황색과 갈색으로 통일돼 있으며, 주위의 낮은 언덕과 산을 가리지 않도록 일정한 높이로 질서 있게 지어져 있다. 아름답고 장엄한 프라하 성과 예술적 조형미가 넘쳐 나는 건축물, 시내 곳곳의 아름다운 공원과 그 앞에 놓인 고즈넉한 벤치와 가로등은 도시 전체가 하나의 통일되고 조화된 예술품이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 모차르트가 사랑하고, 카프카를 비롯한 수많은 예술가가 배출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프라하를 거쳐 베로나에 도착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배경이 된 베로나에서는 해마다 여름이면 로마시대에 건축된 원형경기장에서 베르디의 오페라를 공연한다. 그곳에서 세계 각 곳에서 온 사람들과 함께 나부코를 관람한 후 피렌체·로마·파리를 거쳐 런던에 도착했다.

우리가 방문한 유럽의 여러 도시들은 서로 매우 달랐지만, 나름의 개성과 독특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휴가철임에도 불구하고 극장에서는 뮤지컬·연주회·발레 등이 공연되고 있고, 시내 곳곳에서는 작은 음악회가 열리고 길거리를 지나면서도 아름다운 노래와 연주를 쉽게 들을 수 있었다. 잠깐 스쳐간 작은 도시들과 농촌들도 한결같이 잘 정돈되고, 질서가 있었다.

유럽의 여러 도시를 여행하면서 교육사가인 보이드의 말이 떠올랐다. “길거리를 지나갈 때 (아테네 사람들은) 일찍이 세계가 알고 있던 가장 훌륭한 예술작품이 이쪽저쪽에 늘어서 있는 것을 보게 된다…봄이 되면 디오니소스 극장의 지정석에 앉아 비극 공연을 아침부터 밤까지 관람할 수 있다. 분명히, 역사상 어느 시대도 사람들에게 이토록 풍부하고 다양한 열정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그야말로 삶이 곧 진정한 교육이었던 시대였다.”

인간은 어떤 삶의 환경에서 살아가느냐에 따라 심성·가치관·삶의 방식 등이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아름답고 지적인 삶의 터전 속에서 인간은 예술적이고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다. 보이드에 의하면 고대 희랍문화가 오늘날 과학과 예술·철학·종교·건축·정치·교육 등의 서구 문명의 모태가 된 중요한 이유는 희랍인들이 이 분야에 탁월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일상적인 삶의 환경 자체가 예술적이고 교육적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행을 마치고 서울에 도착했다.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큰 산들과 굽이쳐 흐르는 한강과 드넓은 들판은 유럽의 어느 도시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아름다웠다. 그러나 서울의 집과 건물의 모양과 크기는 그야말로 제멋대로이고, 건물에 달린 수많은 간판은 아우성을 치고 있는 것 같았다. 도시 전체의 정돈된 질서와 아름다움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동안 우리는 먹고살기도 어려운 여건 속에서 아름다운 도시를 가꾸어갈 수 있는 마음의 여유와 경제력도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세계 12위의 경제대국에 걸맞도록 우리의 삶의 터전을 아름답고, 살기 좋게 가꾸어 보자. 사람들이 산책도 하고, 운동도 하고, 음악회도 할 수 있도록 공원을 더 많이 만들자. 바람이 통하고, 물길이 통할 수 있도록 도로와 건물들을 정비하자. 제멋대로인 간판들도 도시미관을 해치지 않도록 바꾸자. 새로 건설하는 신도시만이라도 세계 어느 도시보다 아름답고 예술적이고 교육적인 도시를 만들어 보자. 아름다운 도시에서 살고 싶다.

정진곤 한양대 교수, 사회교육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