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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인·행정가 거침없는 40년 … "직선적" 평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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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1981년 현대건설 여름 수련회에 참석한 모습. 당시 사장이던 이 후보(오른쪽에서 둘째)가 고 정주영 회장(左)과 함께 춤을 추고 있다.

이명박이 큰 산 하나를 어렵게 넘었다. 샐러리맨의 신화→청계천 복원의 신화에 이어 대한민국의 신화를 쓰겠다는 그다. 19일 오후 4시20분.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 모인 1만5000여 명의 시선은 한나라당의 17대 대통령 후보 이명박에게 쏠렸다.

#1.어릴 땐 적(敵), 이젠 자산이 된 '가난'

'밝을 명(明)에 넓을 박(博)'.

이명박의 어머니 채태원은 밝고 넓은 보름달을 치마폭에 가득 안은 태몽을 꾸고 그의 이름을 명박이라고 지었다.

이명박에게 가난은 여러 모습이다. 어려서 가난은 기억하기조차 싫은 '적(敵)'이었다. 후엔 성공을 향한 각성제였고, 정계에 뛰어든 뒤엔 정치적 자산이자 인생의 스승이 됐다.

이명박은 1941년 12월 19일 일본 오사카(大阪)의 미에(三重)현에서 태어났다. 소를 쳤던 아버지 이충우(81년 작고)는 1933년 고향 포항을 등지고 오사카 근교의 목장에서 일했다. 어머니 채태원(64년 작고)은 초등학교를 중퇴한, 대구의 작은 과수원집 딸이었다.

일본 패망 뒤 귀국길 여객선이 대마도 인근에서 가라앉으며 이명박 가족은 맨몸뚱이 하나로 고향 땅을 밟았다.

옆방의 거지 가족 15세대와 뒹굴며 살았던 포항의 쪽방에서 그가 들은 건 싸우는 소리, 배고파 우는 소리였다. 그가 주로 먹은 것은 술을 빚다 남은 찌꺼기인 술지게미였다. 성냥개비에 황을 붙여 팔았고 군 부대 철조망 밖에서 김밥과 밀가루떡을 팔았다.

"중학교까지만 보내주겠다"는 어머니를 겨우 설득해 동지상고 야간반에 진학했다.

낮엔 뻥튀기 장사와 과일 행상, 저녁엔 학교 수업을 받았던 포항의 추억에 대해 이명박은 "현대건설 회장 때 포항제철에서 행사가 있어도 헬기를 타고 갔다가 바로 당일 올라갔다. 지긋지긋했던 가난의 기억 때문"이라고 술회했다. 가난은 이명박의 성공신화를 더 극적으로 만드는 요소가 됐다. 인생 역전 드라마는 정치인 이명박의 최대 무기가 된 것이다.

#2.학생운동에 뛰어들다

그는 고3 졸업식도 못 본 채 서울로 상경했다. 막노동 일을 전전하던 이명박은 '대학 중퇴라도 하자'는 심정으로 대학 진학에 매달렸다. 고향 친구 김창대의 자취방에서 맨밥에 간장을 비벼 먹으며 공부했다. 김창대는 "명박이는 영양 상태가 좋지 않아 잔병치레가 잦았다. 축농증이 심해 연습장 이면지를 휴지로 썼고, 코를 심하게 풀어 코 주위가 늘 시커멨다"고 회고했다.

이명박은 고려대 경영학과에 붙었다. 그러나 이태원 산동네에서 잠수교 공터까지 리어카로 쓰레기를 나르며 등록금을 벌어야 했던 고학생이었다.

대학 3학년 때 상과대학 학생회장 출마는 이명박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고교 시절까지 공부는 1등이었지만 가난하고 부끄럼을 많이 탔다. 출석번호 7번으로 체구도 작았고 남 앞에 나서길 꺼려해 학급 반장 감투 같은 건 써본 적이 없었다.

'포항 촌놈이 왜 나서느냐'는 비아냥 속에서도 40표 차로 당선된 그는 64년 한.일 국교정상화 반대 데모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4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학생운동의 경력은 '월급쟁이가 평생의 소원'이라던 그의 취업 길도 붙잡았다. 그러나 학생회장.학생운동 경험은 "내성적인 포항소년 이명박을 야심가로 만든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는 게 주변의 평가다.

#3.현대에서의 성공신화… 정주영과 결별

"난 출근해야 하니 너희들은 몇 시간 더 자다 집사람이 차려주는 아침밥 먹고 나가라…."

72년 어느 날 새벽 4시를 좀 넘긴 시각. 현대건설 이사 이명박의 신혼집인 14평짜리 마포 새서울아파트. 함께 술을 마신 뒤 통금시간에 걸려 이명박의 집에서 함께 잤던 대학 동기들에게 이명박이 출근 준비를 하며 던진 한 마디다.

대학 동창 안순용은 "자는 친구들을 놔둔 채 먼저 회사에 출근하는 독한 생활에 놀랐다"고 말했다.

대학을 졸업한 이명박은 태국 공사현장에서 일할 사원을 뽑는 현대건설에 들어갔다.

태국 고속도로 건설현장에서 각목과 칼을 든 폭도들에 맞서 금고를 지킨 '태국 금고 사건'으로 그는 정주영 회장의 눈에 들었다.

중동의 힘든 공사를 잇따라 따냈다. 5년 만에 이사, 10년 만에 부사장, 12년 만에 사장, 23년 만에 회장으로 초고속 승진을 한다.

그의 승승장구 이면엔 '그림자'도 있다. "차다"거나 "인정이 없다"는 비판들이다. "명박이 덕을 봤다는 고향 친구는 하나도 없다"고 말하는 지인도 있다. 그래서 친구들은 "철저한 성취형 인간"이라며 이명박에게 '머신(기계)'이란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

정주영과 이명박의 관계도 정치적 노선 차이까지 극복하지는 못 했다. 두 사람은 92년 1월 3일 공식적으로 결별했다. 정주영의 국민당 창당과 대선 출마가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

"의리 때문에 맹목적으로 기업주를 따르는 것은 옳지 않다" "민자당을 택한 건 사회에 이바지하며 뜻을 펼치기 위한 것이다." 훗날 이명박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92년의 선택은 두고두고 많은 말을 낳았다. 현대그룹과의 불화설도 말끔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 이명박은 27년간 몸담았던 현대를 떠났고 92년 14대 총선에서 민자당의 전국구 의원으로 정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4. 이명박식 정치의 명암

15대 총선이 한창이던 96년 4월 종로구 숭인1동의 한 공터. 신한국당 이명박 후보는 새정치국민회의의 이종찬, 민주당의 노무현 후보와 정치1번지 종로에서 격돌했다.

"여러분이 사는 동네는 왜 이모양입니까. 아이들 장가나 보낼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정치에 관심을 끊으시오."

거침없는 말들이 이명박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참모들은 아연실색했다. 숭인1동은 신한국당엔 무덤과도 같았던 당시 국민회의 총재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아성이었다. "뭐하는 ××야! 미친놈 아니냐?"

여기저기서 야유가 쏟아졌고 연설회는 엉망이 됐다.

하지만 사흘 뒤 이명박은 그곳을 다시 찾았다. '그놈'을 구경하기 위해 수많은 인파가 공터에 모였다.

"김대중 선생께서 대통령이 되면 여러분의 살림이 나아집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국회의원은 더 아무것도 아닙니다. 평창동 부자들은 정치에 관심을 끊었는데 왜 당신들은 정치에 관심을 가집니까. 난 어려웠던 과거가 있습니다. 그래서 부자 되는 법을 압니다."

이명박에 대한 경계심은 풀렸고 이명박은 이 동네에서 몰표를 받았다. 맨투맨 설득과 돌파. 자칫 건방져 보이기까지 한 그의 사람 관리법이자 정치 스타일이다. 청계천 복원을 위해 머리를 맞댄 노점상 대표와의 만남 때도 그랬다.

서울시장 이명박은 삭발을 한 상인대표를 향해 "삭발은 투사들이나 하는 것인데 왜 삭발을 하고 나왔나. 머리가 자라면 다시 오시오"라며 자리를 박찼다. 이후 다시 상인들을 만난 이명박은 "내가 노점상을 직접 해봐 누구보다 고통을 잘 압니다"며 설득을 시작했다.

이런 이명박의 스타일을 싫어하는 사람도 많다. 자신감이 지나쳐 뻣뻣해 보이기도 하고 직선적이라고 흉보는 이들도 있다.

96년 종로에서의 승리는 그에겐 오히려 독이 됐다. 선거자금 과다 지출이란 선거법 위반의 책임을 지고 98년 정계를 떠난다. 선거법 위반자로 낙인 찍힌 그는 꿈꿨던 서울시장 출마는커녕 의원직마저 사퇴하고 미국행 비행기에 도망치듯 몸을 실었다. "내 인생 최대의 실수이며 깊이 뉘우치고 있다"며 그는 여러 번 고개를 숙여야 했다.

#5.서울의 신화, 그러나 그를 붙잡는 의혹들

미국 조지 워싱턴 대학에서 보낸 1년간의 연수 생활에서 그는 다시 칼을 갈았다. 워싱턴 근교의 좁은 아파트에서 가구 없이 빈 박스를 엎어 그 위에 전화기를 올려 놓는 금욕에 가까운 생활을 했다. 딸과 사위 등 일가족 6명이 서부를 여행할 때도 렌터카를 하나만 빌려 다녔다. 이렇게 이명박은 재기를 다짐했다.

서울로 돌아온 이명박은 경선 내내 문제가 된 BBK 논란의 핵심 주역인 김경준과 동업해 인터넷 금융회사를 차리기도 했다.

와신상담(臥薪嘗膽). 2002년 이명박은 95년, 98년에 이은 세 번째 도전 끝에 서울시장 직에 올랐다. 대부분이 불가능하다고 말렸던 청계천 복원 사업의 성공은 이명박의 대통령 도전을 가능케 한 최고의 발판이 됐다. 이명박과 서울시청의 상인 담당팀은 무려 4200번이나 상인들을 설득해 청계천 공사의 최대 걸림돌을 제거했다. 공사 기간은 불과 2년.

이런 추진력은 '불도저'란 그의 별명을 새삼 확인시켰다. 그러나 이명박은 "청계천의 다리 하나, 심지어 돌 하나에도 신경을 안 쓴 부분이 없다"며 "밀어붙이기만 하는 불도저가 아니라 컴퓨터가 달린 불도저, 컴도저다"라고 주장했다.

2005년 10월 완공된 청계천 복원 사업은 서울시민과 지방 관광객, 외국 관광객들을 끌어 모으며 '청계천 신드롬'을 만들어 냈고, 이명박은 단숨에 유력 대선 후보 대열에 합류했다.

그는 청계천 복원 외에도 대중교통 시스템 개조, 뚝섬 서울 숲 조성으로 서울의 모습을 바꿔놓았다.

가난에 찌든 포항 소년이 기업인으로, 그리고 다시 행정가로 성공하기까지 40여 년간의 거침없는 비상은 이명박에게 '신화' '경제 대통령 후보'라는 수식어를 달아주었다.

그러나 그 인생 행로 가운데 쏟아진 수많은 의혹은 경선 과정 내내 그를 괴롭혔다.

'약점 많은 후보' 논란에 빠진 그가 4개월간의 대선전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 관심이다.

서승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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