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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찾기>오순도순 과일바구니 주고받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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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입춘도 지났건만 설밑 추위는 여전해 손이 곱는다.까마득한 산등성이에는 여기저기 희끗희끗한 눈이 덮여 있다.
때이르게 앞머리가 벗겨진 김만복 사장은 마누라가 뜨개질해준 감색 털실모자를 다부지게 눌러 쓴다.그리고 등산용 파카 주머니를 뒤적여 찌그러진 도라지 담배갑을 꺼낸다.그가 목장갑을 낀 채로 담뱃불을 붙여 물자 마침 택시 한대가 굴러와 멎고,뒷문이기세좋게 열리며 안에서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그를 부른다.
『어이,김사장.일착이구먼.아직 다들 안 왔나?』 택시기사가 건네주는 백원짜리 동전 세개를 손에 챙겨든 친구는 동창생들 사이에「칼잽이」로 불리는 어느 종합병원 외과과장 성기철이다.한때가까운 친구들이 사람 배 따는데는 漢江이남에서 제일이라고 그의집도(執刀)실력을 과대포장하곤 했 지만 쉰 고개를 이태 앞둔 성박사가 지금도 밤늦도록 맥주를 마시고 나서도 다음날 오전 중에 수술을 두 건씩이나 너끈히 해치우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짝에 납작한 거북이 배낭을 울러메며 성박사가 직업의식을 과시한다. 『야,김사장.오래 살고 싶거들랑 너 제발 담배끊어라.아침부터 무슨 놈의 담배를 길거리에서 굴뚝처럼 피워대냐?』 『눈뜨고 첫 담배다.좀 봐줘라.』 『잘 알 것이다만 내가 지금도 맥주를 열병씩 마시고도 다음날 손 안 떨고 칼 잡는 건 전적으로 담배 안피우는 덕이다.참고해라.사람이 길에 나서면 스승은 늘 바로 곁에 있느니.』 『사람이 하던 짓 안하면 병 나느니.
뇌물 담배라서 더 맛있다.』 『뇌물? 거 좋지.웬 뇌물이 그렇게 잗다랗냐?돈봉투는 못받더라도 적어도 과일 바구니는 받아야지인품이 한결 돋보이지.』 『직원들이 설 보너스 받았다고 명색이사장한테 들이미는 선물이란게 고작 도라지담배 다섯보루더라.』 『불경기다 뭐다 해대더니 그래도 보너스 줄 형편 되었으니 다행이다.』 김사장은 블라우스.스커트 따위를 수출하는 조그만 섬유회사를 꾸려가고 있는데 근년에는 면 50% 폴리에스터 50%의헐값 혼방 블라우스를 중국과 러시아에 풀어먹여 그런대로 쏠쏠한재미를 보고 있다.지난 해에는 7백만불쯤 실어냈고 이 런저런 세금과 은행 대출금리 떼고 직원들 퇴직금 미리 붓고 사무실 운영경비에다 구전 같은 것을 뜯기고도 매출액의 5%쯤은 떨어지는업종이라 겨우 밥은 먹고 사는 형편이다.그에게 유일한 낙이 있다면 아직 골프칠 여유는 없는만큼 가까운 고등학교 동기생들과 일요일에 북한산을 서너 시간씩 타는 것이다.이제는 각자가 살아가는 길이 워낙 달라서 만만한 산우(山友)내지는 악우(岳友)라고밖에 할 수 없는 면면 중에는 외과의사,어느 무역회사의 영업담당 이사,처가집의 알짜 부 동산을 눈가림으로 임대하여 주유소를 운영하는 기름 장사,「영감」으로 불리는 부장판사 등 일여덟명이다. 봄철이나 가을철에는 더러 아내들까지 대동하여 성원이 꽤 차지만,한여름이나 겨울 한철에는 기껏 서너명이 구기동 삼거리에서 아침 여덟시쯤에 만나 쉬엄쉬엄 걷다가 쉬다가 하며 서로세상사도 주고받고,하산 후에는 점심겸 술들도 마시고 나 서 함께 목욕을 하고는 대개 오후 서너시쯤 헤어진다.
김사장은 물론 10여년 전부터 산행 예찬론자로 살아오는 터라일요일마다 거의 빠지는 법이 없다.산우들끼리는 흔히「육수」라고불리는 땀을 흠뻑 뺄 수 있어 좋고,어느새 가뭇없어지고 있는 하초힘을 돋우는데도 보약보다 효험이 있는 듯하 고,이런저런 골치 아픈 걱정거리를 잠시나마 털어버릴 수 있어 좋기 때문이다.
행 취미 덕분인지 아직 돋보기도 끼지 않는 김사장이 좋은 눈으로 알아본다.
『저기 기름쟁이 박군이 타박타박 올라오네.』 박사장은 부지런한 사람이라 산행의 연락책을 맡고 있다.땅딸막한 박사장이 1주일만에 만나는 산우들에게 제 소임을 챙긴다.
『다들 이런 저런 핑계로 바쁘덴다.우리 셋이 타자.』 성박사가 앞장 서며 받는다.
『오늘 행로도 향로봉 뒤쪽으로 치고 올라 암문으로 해서 대남문 거쳐 정릉 골짜기로 빠질 거지?』 『그래 그 길이 제일 한적하고 좋아.1주일 내내 사람들한테 치인 몸들 아냐.』 세 친구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길을 줄여간다.곧장 산자락에다 끌밋끌밋한 주택들이 들어앉은 동네가 나오고 가파른 고갯길을 올라가자 잡목이 빼곡한 사이로 눈 덮인 뽀얀 등산로가 구불구불하니나타난다.
등산객들이 보이지 않아 겨울 산행의 정취가 벌써 무르익어 간다. 앞서 가는 성박사가 가쁜 숨길을 몰아쉬며 말한다.
『오늘 물주는 아무래도 뇌물 담배 다섯보루 받아먹은 김사장이해야 될란갑다.』 물주란 하산후에 점심과 술을 사고 대중사우나의 목욕비 일체를 도맡는 사람을 가리킨다.
매번 돌아가면서 맡는 그 정도의 씀씀이야 푼돈이어서 서로가 핑계거리를 찾는 것이다.
뒤따르던 김사장이 선선히 받는다.
『아무려나.내가 아무리 별 볼일 없는 옷쟁이라도 설마 그깐 물주노릇이야 못할까?』 박사장도 짐작이 가는지 화제에 끼어든다. 『뇌물이란 원래 크고 작은 것을 떠나 자주 받을 수록 좋은거야.오죽하면 천하를 잡은 황제도 제 손아귀에 드는 작은 선물에도 감지덕지 눈이 먼다고 했을까? 야,김사장.무슨 뇌물성 담배야? 돈봉투나 백화점 과일바구니는 따로 없었나? 나 도 친구잘둔 덕으로 그 뇌물 담배 한대 얻어 피워보자.』 엎어진 김에쉬어간다고 세 친구가 뇌물이라면 다들 할 말이 많아 양지바른 둔덕에 우쭐우쭐 선다.그리고 모자들을 벗고 땀을 훔친다.
애연가 김사장이 새 갑을 뜯어 담배 한 개비를 물고나서 아예갑채로 박사장에게 건네준다.
『뇌물 담배 여다.아껴 피워라.』 성박사가 박사장에게 내막을일러준다.
『이 친구 회사 직원들이 보너스 탔다고 지네들 사장한테 구정선물로 디민 거란다.』 『도라지 담배도 선물축에 끼나?』 『갈비짝은 못 디밀망정 담배 선물이라니,그놈의 회사 형편 알만하다.』 서로 뒤질세라 요즘의 화제를 받고챈다.
『자보(自保)돈봉투 사건 역시 흐지부지 끝나고 말더구먼.검찰은 단매에 족칠 것같이 덤비더니만 심증은 여실한데 물증이 없다는 뻔한 소리나 하고서는 슬그머니 주저앉고….』 『원래 뇌물 시비는 오리발 앞에서 꼼짝 못하는 거 아냐? 안 주고 안 받았다는데야 용 빼는 재주 있나! 실명제가 무색해서 딱하기 짝이 없더구먼.이 금수강산에 사람의 탈을 덮어쓰고 태어나서 돈봉투도짬짬이 받아보고 해야 사는 것같이 사는 건데,우리는 이제 글렀지? 한심한 인생들이야.』 ***성 박사의 자조적인 한탄에 김사장이 삐딱하니 퉁을 놓는다.
『그렇게 부럽거든 자네도 표밭이나 누벼 금배지 한번 달아보라마.금배지 속에 새겨진 글자가 혹 혹(或)자니 혹시 알겠나,사람 속 훤히 아는 우리 성박사를 국회로 보내자구 우루루 표 몰아줄지….』 『선량이야 시켜만 준다면 내남없이 누가 마다하겠나만 우리처럼 간 작은 사람은 몰래 주는 뇌물도 겁이 나서 못 챙겨 먹고 뒷방구석에서 빌빌 댈텐데 거수기하기 딱 알맞을 테지.』 박사장도 들은 풍월이 있어 나선다.
『헌데 그 말썽 많은 회사도 위 아래가 한창 찌그럭 거리기는하더구먼 뭐.돈봉투에 도장이 촘촘히 찍혀 있었다니 그게 위아래가 서로 못 믿고 있다는 증거 아닌가?그 큰 회사가 로비하는 돈봉투를 곧이곧대로 전할 심복 하나를 제대로 못 거느리고 있으니 한심한 꼴 아냐?그 대목만 봐도 그 회사를 선량들이 좀더 호되게 몰아쳤어야 하는건데,아쉽더구먼 뭐.』 『그러니 우리나라도 술상무라는 직책이 있듯이 전문적인 로비이스트를 양성하고,떡고물 하아먹는 로비 회사를 별도로 운영해야지.뻔한 노동쟁의가 선량들에게 과일바구니나 돌려서 해결된다면 좀 우습잖아.』 ***김 사장이 대들듯 말한다.
『준 사람이야 성의라는데 험담할 거 뭐 있나.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고 이익 남기자고 하는 짓인데.넙죽넙죽 받아 처먹는 인간들 죄부터 나무래야지.』 이번에는 박사장이 경험담을 쏟아낸다. 『그놈의 성의.협조 등쌀에 해먹고 살게 없다니까.뜯기는 데가 좀 많아.얼마 전에 김대통령이 내무부 연두순시 때 경찰 고위간부도 민간의 협조를 받고 있는 건 사실이라고 실토했더구먼.
백번 바른 소리지.그 협조가 결국 준조세고 성의야.말 이 좋아협조지 이제는 옛날처럼 공갈도 때리지 않고 싹싹하게 제 발로 찾아와서 아예 내놓으라고 통사정이야.거지가 따로 있나,밥대신에돈 비럭질하는 것도 거지지.』 성박사가 싱글벙글거리며 결론을 내린다. 『찾아가면 성의고 찾아오면 협조구먼.하기야 우리 사회가 언제부터 이 지경으로 구걸문화가 정착되었는지 한심 천만이야.』 김사장이 향로봉을 우러러보다 가풀막을 앞장서 걸으며 뇌까린다. 『구걸문화?그거 말되네.그게 어디 어제 오늘의 전통인가.저 위로는 수행 빌미로 탁발승을 민간에 내려보낸 것도 구걸문화고 가까이로는 6共때 청와대 주인 양반도 불우이웃돕기한다면서성금 거둔 게 다 그거지.어쩌겠나.그나마라도 뜯길 형편 인 걸고맙게 생각하고 도와주며 살아야지.우리나라가 오늘처럼 떵떵거리며 사는 것도 다 그 아담한 보시문화 덕인 줄이나 알아! 얼마나 좋아,서로 오순도순 과일바구니 주고받으면서 즐겁게 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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