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주시비속 「비리척결」 일단 성공(김영삼 개혁 1년:1)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군·공직자 사정은 「준혁명적」 조치/충격요법 위주 청사진 제시 미흡
「신한국 건설」을 집권목표로 하여 「변화와 개혁」 노선을 세차게 몰아붙인 김영삼대통령의 재임 1년은 말 그대로 격동의 세월이었다.
32년간에 걸친 군정을 마감하고 들어선 김 대통령은 한국병의 치유없는 미래건설은 공허한 것이라고 결론,취임 직후부터 개혁의 바람을 주도했다. 개혁의 밑그림이 없이 즉흥적인 조처와 시책을 펴고 있다는 끊임없는 비판도 있었지만 문민정부의 1년은 대체로 긍정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김 대통령은 변화와 개혁노선의 추진수단으로 제도개혁과 악습의 관행을 깨기 위한 충격요법을 구사했다. 제도개혁에 앞서 선행적 조처로 기존구도를 뒤흔드는 충격조처는 한편으로 깜짝쇼라는 비난도 받았지만 효과를 나타냈다.
김 대통령은 한국병의 뿌리를 부정부패와 권위주의에 있다고 보고 이의 청산에 지난 1년간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제도의 개혁에 앞서 충격요법을 동원한 과단성있는 조치들이 쉴새없이 퍼부어졌다. 가혹하리만큼 사정의 칼날을 휘두르고 구 권력의 핵심부를 난자했던 것은 준혁명적 상황에서 어느 면에선 불가피했다고 볼 수 있다.
악습의 고리를 끊기 위한 칼날 사정작업은 권위주의 정권의 세력기반이었던 군부·안기부,권력의 그늘에 안주하던 검찰 및 경찰에까지 가차없이 진행됐다.
공직사회 정화는 구 정권에 대한 비리조사로 시작됐고 휘몰아친 사정태풍에 1천3백여명의 비위공무원이 날아갔다. 재산관련 물의로 2백42명이 공직을 떠났다. 여러 장·차관 등 고위공직자들도 재산문제로 도중하차해야 했다. 정치권도 예외는 아니었다. 전·현직 국회의장을 포함,3명이 의원직을 사퇴했고 집권당 소속 4명의 의원이 출당됐다. 대법원장도 불명예 퇴진해야 했다. 이같은 기반의 조성을 끌낸 정부는 제도적 보완책으로 공직자윤리법을 개정했고 정치관련 개혁법안의 개정을 국회에 넘겼다.
권위주의 잔재 청산은 군부의 정치군인을 솎아내는 사태로 이어져 육·해·공군의 4성장군 모두가 군복을 벗고 3성장군의 70% 이상이 교체되는 군부정리로 나타났다. 안기부는 고위간부 거의를 교체한후 정치사찰 금지를 내용으로 한 엄한 안기부법 개정으로 그 위상을 재정립했다. 정치군인 제거와 더불어 비정상적인 통치구조의 정상환원 조치의 일환이었다. 이와더불어 감사원 기능을 복원하는 등 정부의 각 기관의 제자리 찾기를 도모해 공직사회의 분위기를 일신하려고 했다.
금융실명제의 전격 실시는 검은 돈의 생성가 이동을 차단,정치권의 부정부패를 막고 깨끗한 사회 실현의 계기를 마련했다. 은행인사 등 각 분야의 자율화를 위한 배려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개혁성과와 국민적 지지를 업고 금년 들어서는 국가경쟁력 강화라는 국정목표를 제시하며 각종 규제완화조치 등 국제화·개방화 시책을 펴고 있다.
그러나 김 대통령정부는 경제 및 물가정책 등 건설쪽의 국정수행 능력에는 이렇다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한계를 보였다. 보복·표적사정의 의혹,지나친 사정으로 인한 공직사회의 복지부동 현상과 일련의 국정수행 과정에서 두드러진 김 대통령 1인 중심의 일추진과 「깜짝쇼」로 불린 충격요법 위주의 일처리,이로인한 인치 및 무원칙·인기영합 시비는 현 정권 스스로 풀어야 할 숙제다. 구체적이고 장기적인 개혁프로그램과 비전이 결여됐다는 지적도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김영삼정부는 특히 우루과이라운드(UR) 협정에 속수무책으로 대응했고 북핵 문제와 관련,북한­미의 교섭을 방관적 자세로 임하는 등 국제외교문제에 미숙한 점을 보인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김현일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