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이쓰는가정이야기>최재필 명지대 건축학과 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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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얼마전 국교 3년생인 딸 아영이가 겨울캠프에 간다고 엄마와 함께 옷과 세면도구등을 챙기고 있었다.두 밤을 자고 돌아온다니정확하게 이틀하고 반나절 집을 비우게 되는 셈이었다.아내는『뒤치다꺼리 해야 할 식구가 하나 줄어드니 좀 편해 지겠구나』라고짐짓 잘 되었다는 투로 말했지만,나는 당장 아영이가 떠나는 날오후부터 허전해 할 아내를 눈 앞에 떠올릴 수 있었다.우리는 10년을 함께 살아온 부부니까.
『아빠,남이섬까지는 차로얼마나 걸려요? 밤에 잘 때 추울까?』아영이는 엄마의 말은 아랑곳 하지 않은채 들뜬 목소리로 재잘거리기만 한다.그런데 올 봄 국민학교에 입학할 민기는 거실 소파 한쪽에 앉아 아무 말 없이 풀죽은 모습이다.캠 프로 떠나는제 누나가 부럽고 샘이 나서 그러는가 보다.
『내일부터는 아영이,민기 두 녀석이 같이 떠들지 않을테니 집안이 조용해져 좋겠는걸.』나도 한마디 거들며 슬쩍 민기를 건드려 본다.그래도 민기는 가만히 앉아있기만 한다.민기 앞으로 다가가 살펴보니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아니 민기 왜 그래?』그제야 민기는 입을 연다.『누나가 밤에 잘 때 우리 보고싶어서 울면 어떡해? 또 이렇게 추운날 집밖에서 고생하잖아….』아내와 나는 이 순간 우리 아들의 착한 마음씨에 감동하고 만다.
아내의 콧잔등이 시큰거리기 시작하는 것을 나 는 보지 않아도 다 안다.
세상 살아가는게 무엇이 그리 바쁜지 우리 부부도 여느 부부나마찬가지로 차분히 마주 앉아 이야기 나눌 시간이 많지 않다.그런데 아영이가 떠나가고 없는 첫날 밤,민기를 재워놓고 우리 둘은 밤늦도록 아영이와 민기 이야기를 하며 웃고 울 수 있었다.
갓 태어난 아영이를 탯줄도 끊기 전에 내가받아 가슴에 안는 순간 아영이가 내 옷에 쪼르르 오줌을 누던 일이며,한살바기 민기가 눈가가 찢어져 병원에서『엄마아,아빠아』를 외치는 소리를 들으며 응급실 밖에서 우리의 가슴도 찢기던 것을 느끼던 일 등.
아이들이 커가며 남겨주는 이야기들을 소중히 받아 간직하는 일이야말로 우리 부부의 즐거운 의무요,놓칠 수 없는 권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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