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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비서실>161.박종철사건 조작 정국 강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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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87년5월25일 오후11시30분 청와대 접견실.
全斗煥대통령은『피곤할텐데 칵테일 한잔씩 하지』라며 부드럽게 술잔을 권하고 있었다.심야에 불려온 사람은 張世東안기부장과 金聖基법무장관.
두사람은 잔뜩 굳어있었고 배석해 있던 安賢泰경호실장이 이들에게 칵테일을 한잔씩 갖다주었다.먼저 잔에서 입을 뗀 全대통령은한사람씩 쳐다보며 담담히 말했다.
『金장관,그동안 고생했어.좀 쉬어야겠어.』 『알겠습니다.』 『張부장,수고 많았지.그래 좀 쉬어.』 『네,각하.』 날던 새도 떨어뜨린다는 2년3개월간의 안기부장,그리고 이전 3년7개월동안 경호실장을 지낸 5共 실세가 추락하는 장면이었다.全대통령은 고민고민하다가 내린 결심이었지만 이처럼 자신의 分身을 자르는「의식」은 간단히 끝났다.
全대통령은 특별히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는 어떤 소회도 피력하지 않았다.당시의 상황이 그만큼 급박했기 때문이었다.그해 1월에 터졌던 朴鍾哲고문치사사건이 1주일전인 5월18일 범인축소조작으로 드러나면서 정국은 급랭하고 있었다.
이튿날인 26일 全대통령은 盧信永국무총리와 張世東부장을 퇴진시키는 전면개각을 단행했다.12대 民正黨 전국구의원을 하다 법무장관에 임명된 金聖基장관도 경질됐고 朴鍾哲사건 발발때 등용된鄭鎬溶내무장관도 그만두었다.후임총리에 李漢基前감 사원장,안기부장에는 安武赫국세청장이 임명되었다.
이 개각은 5共권력질서의 지각변동을 의미하면서 盧泰愚民正黨대표 후계체제의 등장을 내외에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張부장의 퇴장은 갑작스런 것이었다.외부의 관측과 달리 全대통령은 25일 아침까지만해도 張부장을 유임시키려 마음먹고 있었다.張부장 역시 全대통령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때 자신만 물러가는것이「不忠」이라는 신념으로 사건을 마무리짓는데 심혈을 기울이고있었다.그러나 이런 상황은 전격적으로 反轉되었고,그 배경에는 권력이동과 관련된 비화가 숨어있었다.
5월24일 일요일 저녁 청와대 부근 孝子洞의 한 음식점.朴鍾哲사건의 확대로 난감한 처지에 있었던 鄭鎬溶내무장관과 李春九民正黨사무총장은 그곳으로 은밀히 한명의「손님」을 초대했다.두사람은 당시 盧대표의 대권승계에 앞장선 핵심이었다.鄭 내무가 입을열었다(다음 대화는 당시 정부고위인사 Z씨의 기억).
『朴鍾哲사건은 이제 걷잡을수 없을 만큼 커지고 있다.수습을 위해서는 특단의 대책이 있어야 한다.경찰에 의한 조직적 은폐기도가 밝혀진 이상 정권의 신뢰도와 도덕성은 치명상을 입을 수밖에 없다.金泳三총재의 통일민주당이 이사건을 계기로 정국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학원.재야.종교계를 묶어 국민적 저항의 분위기로 정부와 民正黨을 압박해 오고 있다.』 잠자코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인 손님은 金聖基장관이었다.鄭장관은 목소리를 낮추면서 어조를 바꿔 말을 이어갔다.
『朴군을 치사케한 치안본부 대공팀은 경찰소속이나 실제 안기부가 관장하고 있지않습니까.예산이나 업무지시가 안기부로부터 나옵니다.구속된 경찰관들에게 제시했다는 1억원짜리 예금통장이 사실이라면 이는 안기부 정보비를 몰래 쓴것으로 봐야지요 .그런 점에서 안기부장이 책임을 져야죠.경찰쪽에만 책임을 물으면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鄭장관은 끝으로『金장관,내일 검찰수사를 보고하기 위해 청와대에 들어가시지요.全대통령에게 책임소재에 대한 분명한 설명을 해주셨으면 합니다』고 부탁했다. 金장관은 鄭장관과 李총장의 이같은 요청이 張世東부장의 인책퇴임에 함께 나서달라는 뜻임을 알아챌수 있었다.전날(23일)盧信永총리 주재의 고위당정회의에서 鄭장관이『1월 朴군사건이 일어났을때 현직에 있던 사람은 나를 포함해 모두 책임 을 지고 물러나야한다』고 한 말을 金장관은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鄭장관의 張부장 동반퇴진 공작이 본격화하는 순간이었다.鄭장관과 李총장의 정치적「해결사」요청에 金장관은 내심 놀랐지만 기본적으로 전면개각이 불가피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서 그 요구를 수락했다.
盧泰愚대표측의 張부장 퇴진 압력은 장시간에 걸쳐 서서히 추진되어왔다.그 빌미를 제공한 것이 바로 全대통령이었다.全대통령은87년3월25일 民正黨 당직자들을 청와대로 부른 자리에서『야당과의 협상등 정국 주도권한을 盧대표에게 주겠다』 고 언명했다.
이어 있은 4.13선언은 야당에는 개헌의 거부였지만 권력내부에선 盧泰愚후계체제를 확정짓는 것이었다.이를 계기로 盧대표는 후계 굳히기 작전을 위한 인맥을 구축했고 鄭장관과 李총장이 핵심이 되었다.
그러나 全대통령은 盧대표진영의 기대대로 움직이지 않았다.후계자리를 주더라도 내각의 간판엔 盧총리,이면엔 張부장을 계속 포진시키는 권력관리의 틀을 유지하려 했다.盧대표는 이런 구도에 불만일수밖에 없었다.全대통령의 구상대로 가다간 후 계체제의 확실한 착근이 어렵다고 본것이다.그런 분위기속에 터진 朴鍾哲사건2탄은 盧대표진영에 절호의「기회」를 가져다 주었다.
6월10일 民正黨 전당대회에서 대통령후보로 지명받게 돼 있던盧대표 진영은 두가지 방향에서 대권고지에 접근하고 있었다.첫째는 간선대통령제 헌법에 의해 全대통령과 똑같이 야당의 눈치를 안보고「체육관 선거」로 당선하는 것이었고,다른 하나는 兩金씨의야당과 재야에 강온 양면으로 맞서 야당을 선거에 참여시키는 것이었다.그러나 그같은 안이한 판단은 곧 6.10항쟁으로 좌절하고 6.29라는 국면 대전환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방법을 택하든 盧대표 진영에서는 張부장과 盧총리가 장애물이었고 차제에 탈락시켜야 된다는 생각을 굳혔다.문제는 두사람에 대한 全대통령의 신임이 각별하다는 사실이었다.全대통령은 朴군 사건의 진상규명과 엄격한 의법조치를 강력 지시 했지만 정치적 문책에는 주저하고 있었다.張부장의 퇴진을 건의하는 것은「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였다.金聖基장관에 대한「정치적 청부」는 그런 상황에서 짜낸 盧대표측의「묘책」이었다.
청와대관계자 출신 Q씨의 증언.
***중립적 인사 물색 『알려진 것과 달리 鄭장관은 全대통령에게 張부장의 퇴진을 직접 건의할수 있는 위치나 신임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鄭장관의 동반사퇴론은 분위기를 잡는데 일조했지만 全대통령의 결심과정에는 큰 영향을 못미쳤어요.그래서 盧대표측은 중 립적 입장인 金법무에게 부탁한 것이지요.또 鄭鎬溶씨와 金聖基씨의 부인은 친척이었어요.鄭장관과 李春九총장의「모의」는 당연히 盧대표와 상의한 것이었지요.』 鄭.李가 金장관을설득하던 같은 시간 밤,청와대에는 盧대표측의 희망과는 다른 기류가 형성되고 있었다.全대통령은 盧泰愚대표.盧信永총리.張世東부장.安賢泰실장을 불러 식사를 하고 있었다.
다음은 당시 관계자들의 증언을 종합한 현장 분위기.
盧총리가 먼저 朴군 사건에 책임지고 물러나겠다는 퇴진의사를 꺼냈다.이에 全대통령은『총리,도대체 어쩌자는거요.정권을 같이 책임지자고 해놓고 혼자 편하려고 하는겁니까.임기가 겨우 9개월밖에 안 남았는데 혼자 물러나다니…』라고 말렸다.
盧총리는 자세를 가다듬고 다시 말했다.(朴鍾哲사건 은폐조작사건의 심각성을 거론하면서)『아시다시피 닉슨이 그만둔 것도 도청했다고 그만 둔것 아닙니다.거짓말 때문에 탄핵받은 것입니다.제가 책임지고 그만두지 않으면 그 累가 각하께 갑니 다.』 그러자 全대통령은 盧대표의 생각은 어떠냐고 물었다.全대통령은 사석이라도 盧총리에겐 존대말을 썼지만 盧대표.張부장에게는 예사로 반말을 했다.『어이 노태우,말좀 하시오.태우야,말좀 해 봐.』아무말도 않고 잠자코 있던 盧대표는 속마음을 끝내 내비치지않고분위기에 맞는 얘기로 맞장구쳤다.
***26面에 계속 ***25面에서 계속 『총리가 그만 두어서는 안됩니다.』 盧대표는 그 시간 다른 장소에서 자기 편으로뛰고있는 鄭鎬溶.李春九씨와는 다른 이야기를 한 것이다.결국 全대통령은 내각총사퇴와 4.13취소를 요구하는 야당의 공세와 여권 일각의 대폭개편여론을 묵살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盧총리는 사표를 집어넣고 충성을 다짐하면서 청와대를 나섰고 張부장도마음을 다시 가다듬었다.
盧대표는 처음부터 張부장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갖고 경계하고있었다.張부장이 자신과 2人者 경쟁을 했다고 보았기 때문일까.
그러나 全대통령과張부장을 잘아는 사람들은 張부장이 결코 후계에야심을 품지 않았으며 全대통령 역시 張부장을 자신의 후계자로는생각하지 않았다고 증언하고 있다.Q씨의 주장.
***盧,張부장에 불만 『盧대표와 張부장이 2인자 경쟁을 벌였다는 것은 어울리지않아요.全대통령은 張부장을 후계감으로 보지않았지요.全대통령은 일찍부터 盧대표를 점찍었지요.중간에 이따금흔들어놓은 것은 盧대표에게 긴장을 주고 권력누수를 막으려는 의도적인 것이었지요.』이런 견해에는 6共시절 참모총장을 지낸 金振永씨나 全대통령의 장남 宰國씨가 전폭 동의하고 있다.물론 盧前대통령 주변에서는 全대통령이 달리 찾아봐야「대안부재」였으며 2인자로 매끄럽게 처세한 결과라 보고있다.
盧대표로서는 張부장이 자신을 견제하고 있다고 판단할수있는 소지는 어느정도 있었다.다음은 그 배경의 하나.85년2월말 盧올림픽조직위원장이 民正黨대표로 임명될 무렵,안기부장으로 자리를 옮긴 張부장에게 全대통령은 임무를 하나 더 부여했 다.『집권당대표 자리는 자기도 모르게 청탁과 이권개입의 잡음이 날수 있다.盧대표가 내무장관을 할때 지방순시가 요란하다는 보고가 동원한차량의 사진을 붙여 올라온 적이 있다.盧대표 주변을 철저히 관리하라.』 이에 대한 Q씨의 설명.
『원칙주의자인 張부장은 일단 임무를 받은 이상 盧대표 주변을빈틈없이 관찰,파악했지요.盧대표와 가까운 사람들이 안기부의 이상한 눈초리를 의식하게 되자 두사람사이에는 자연히 불협화음이 생길수 밖에 없었지요.張부장은「가지치기」를 해준다 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받아들이기가 쉽겠습니까.盧대표는 張부장이 자신의 발을 붙잡는다고 생각할 수 있었지요.』 그러나 張부장측은 85년 가을에 있었던 북한 許錟의 서울방문과 자신의 평양방문등 주요문제에 대해 盧대표에게 설명해주는등 할 일은 했다고 주장한다.그런 브리핑은 대개 盧대표의 처고종이며 안기부장특별보좌관인 朴哲彦씨를 시켜 했고 朴특 보를 곁에 두었다는 것 자체가 특별한 배려였다는 것이다.
『朴특보는 張부장의 배려측면을 묵살하고 자신의 노력에 의해 정보를 갖다 바치는 것으로 행동했지요.또 盧대표 주변인사들은 대개 張부장의 민정당에 대한 개입을 과장해서 분석,盧대표에게 나쁘게 입력시켰지요.이런 것들이 겹치면서 오해가 쌓 인 측면이많지요.』(Q씨) 25일 월요일 청와대-.오전 10시가 넘어 金聖基법무장관은 朴군사건 보고를 위해 全대통령과 독대하는 기회를 가졌다.徐東權검찰총장이 자리를 비키고 단둘이 되자 金장관은은폐.축소에 대한 수사진척 내용과 함께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하룻밤만에 번복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은 안기부에서 실질적으로 관장하고 예산지원도 하고 있습니다.이 사건의 수습과 인책문제도 두기관간의 지원협조관계를 고려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전날저녁 鄭장관과 나눈 대화내용이었다.
全대통령은 신중히 듣고는『아,그런가』라며 무언가 고심하는 표정이었다.사건수사를 맡은 장관의 얘기가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게만든 것이었다.全대통령은 덮어버린 盧총리와 張부장의 경질을 다시 마음속에서 꺼내는듯 했다.金장관은 盧대표쪽에 서 주문한「방울」을 훌륭히 달아준 것이다.
오전의 청소년대책회의가 끝나기 무섭게 全대통령은 盧총리를 불렀다.전날밤 유임되는 것으로 알고 청와대를 나왔던 盧총리는 새로운 호출이 해임통보인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그리고 全대통령의 마음이 변한 이유를 알수 없었다.Q씨의 이어 지는 회고.
『全대통령은 옳다 싶으면 남의 말을 빨리 받아들입니다.귀가 엷다고 할 정도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듣습니다.金장관의 진언이 촉매역할을 했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개각이 불가피하다는 생각을 가슴에 남겨뒀기 때문에 全대통령이 바로 받아 들여 실천에 옮긴 것으로 압니다.』 全대통령은 張부장을 잠시 쉬게했다가다시 쓸 생각이 있었다.바로 청와대비서실장으로 컴백시키는 것이었다.그러나 6.29후인 7월중순 朴英秀비서실장을 내보내고 張부장을 앉히려 했지만 金容甲민정수석과 민정당쪽의 반대가 거세 뜻대로 되지 않았다.盧泰愚후계체제는 그만큼 기반이 강해져있었다. ***盧씨 측근 첫등용 25일 자정넘어 盧대표는 全대통령과청와대에서 후임 안기부장을 물색했다.그리고 安武赫청장을 함께 찍었다.盧대표의 핵심부서 인사참여는 처음이었으며 후계자로서 위치를 실감했다.
26일 오전에 全대통령은 전면 개각내용을 李鍾律대변인을 통해발표했다.국무총리는 5共초기 감사원장을 지내고 민정당후원회장인호남출신 李漢基씨가 기용됐다.全대통령은 발표 2시간 30분전에李총리에게 전화를 걸어 통보했다.내무에 高建 민정당의원,법무에丁海昌대검차장이 임명되었다.그리고 부총리에 鄭寅用재무장관,재무장관에 司空壹경제수석,법제처장에 金鐘鍵사정수석,검찰총장에 李種南법무차관,치안본부장에 權福慶씨가 임명되었다.
5월26일 아침 전면개각 내용을 미리 알고있는 盧泰愚대표는 한층 밝은 표정으로 지구당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지방으로 떠났다. 〈朴普均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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