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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표암 강세황展을 보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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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18세기의 영.정조대는 아름다운 시대였다. 진정으로 우리를 소중하게 여기는 자존의식이 강했고, 진정한 자존을 위해 자기와 남을 돌아보는 지혜가 있었다. 보수와 진보가 서로 엇갈려 교차하며 진솔한 삶의 현장에서 만났고, 상층의 귀족과 하층의 서민이 진실한 인간의식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며 의미있게 소통했다.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1713~91)전'은 시서화(詩書畵)의 예술 형식을 통해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표암은 18세기의 한가운데를 온몸으로 가로질러 살았다.

*** 30년간 김홍도 가르쳐

진보적인 노론이 집권하자 보수적인 명문가의 막내였던 표암은 서울의 기와집을 나와 안산의 초가집에서 30년의 처절한 밑바닥 삶을 살았다. 그 속에서 표암은 생생한 삶의 현장과 꾸밈없는 인간의 진실을 경험했다. 시대가 비록 자신을 버리고 비켜갔지만, 표암은 세상 속으로 들어가고 인간 속으로 들어가 천품으로 타고난 시서화를 통해 새롭게 태어났다.

가령 1747년 6월, 표암은 복날을 맞아 친구들과 함께 개장국을 끓여 소주와 노래를 즐긴 뒤 귀남이라는 아이 종까지 묘사한 풍속화를 그리고, 장쾌한 행서로 '그윽한 정자의 우아한 모임(玄亭勝集)'이라는 제목을 써넣었다. 그리고 다시 "자세하게 그림으로 옮겨서 돌려보고 자랑하네"라는 시를 지어 친구들의 시와 함께 유려한 행서로 아름답게 장식했다.

일상의 생생한 삶 속에서 상하(上下)와 고금(古今)은 물론 아속(雅俗)까지 융합된 새로운 시서화가 태어났던 것이다. 그것은 일상의 삶에 대한 진실한 믿음과 사랑을 말해준다. 표암은 선배들이 일구었던 진경산수화와 풍속화의 전통을 더욱 진솔한 삶의 자리에서 끌어안고, 다시 어린 단원 김홍도를 30여년간 가르치며 정조대왕의 절대적인 후원에 힘입어 최고의 풍속화가로 길러냈다. 그리고 손자뻘의 지체 낮은 화원에 불과한 단원의 풍속화를 보고 최고 입신의 경지라고 극찬하는 단원론과 풍속화론을 선물했다.

이것은 단순히 '실학(實學)'이라는 이름 아래 서구 근대의 열등한 아류처럼 이분법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영.정조대의 두터운 깊이와 따스한 숨결을 말해준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그동안 서양화법을 구사한 대표적인 작품처럼 소개돼 왔던 표암의 '영통동구(靈通洞口)'도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사실 이 그림은 1757년께 표암이 개성의 영통동구를 지나가다 "웅장하고 거대한 돌들이 어지럽게 널렸는데, 크기가 집채만하고 푸른 이끼가 덮여서 보자마자 눈이 아찔한" 광경을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의 매력은 거대한 바위에 널린 하찮기 그지없는 이끼까지 포착한 현실적이고 정취적인 문인의 시적 감각이지, 결코 기계적이고 물리적인 서양화법의 견고한 시각적 질서가 아니다.

*** 청나라 황제도 극찬

물론 표암은 서양화법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영통동구'는 서양화법의 초점(焦點) 투시법과 음영법을 시도한 것도 아니고, 그것이 잘 보이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시점을 좁히지 않는 우리의 산점(散點) 투시법과 한 면이 밝으면 다른 면이 어두운 음양적(陰陽的) 명암법을 통해 형사(形似)를 넘어선 전신(傳神)의 경지를 지향하고 있다. 따라서 이 그림의 특징을 서양화법으로 읽는 것은 정당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참신한 작품을 오히려 미숙하고 어설픈 아류로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

시대로부터 버림받았던 표암은 그러한 정신적 초월의 내공으로 자신을 단련하며 현실을 견딜 수 있었다. 그 결과 만년에는 영조와 정조의 탕평 정치로 벼슬길에 나간 뒤, 청나라 황제의 극찬을 받을 정도로 국제적인 안목을 키우고 추사 시대에 더욱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새로운 예술세계의 문턱까지 이미 넘어서고 있었다. 그림을 통해 사람을 보고, 사람을 통해 세상을 보는 것은 우리의 오랜 예술 전통이었다.그런 점에서 '표암전'은 모처럼 보는 좋은 전시다.

강관식 한성대 회화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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