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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북한 배명복시시각각

꿈에서 본 남북 정상회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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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어젯밤 꿈을 꿨다. 울창한 수목에 둘러싸인 평양 대성구역 임흥동의 백화원 초대소. 긴 탁자 사이로 두 사람이 마주하고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었다. 둘은 핵 문제를 놓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얘기를 먼저 꺼낸 쪽은 노 대통령이었다. 노 대통령의 얘기가 길어지면서 김 위원장의 안색은 점점 변해가고 있었다. 너무 생생한 꿈이었다.

김:참 답답합네다. 내래 속을 확 까뒤집어 보일 수도 없구. 포기하갔다는데 나보고 뭘 더 어카란 말이오? 포기하갔단 말이오. 포기!

노:예? ‘포기’라 했십니까? 정말로 핵을 포기하겠다 이 말입니까?

김: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갔습네까? 난 한 입으로 두 말하는 사람이 아닙네다. 통 크게 핵을 포기하갔단 말이오. 그러니 북과 남도 ‘우리 민족끼리’ 통 크게 한 번 해보자 이 말입네다.

노:좋십니다, 좋고요. 정말 용기 있는 결단입니더. 그러나 문제는 국제사회가 그걸 믿어주는 것 아니겠십니까? 내일 발표할 공동성명에 김 위원장의 핵 포기 결단이 담긴 문구가 포함되면 세계가 깜짝 놀랄 깁니더. 구체적으로 뭐라 하면 좋겠십니까?

김:그거야 실무진 보고 만들라면 되지 않갔습네까? 내가 핵 포기 의사를 분명히 밝혔구, 로 대통령이 이걸 확인했다. 뭐 이런 정도면 되지 않갔소?

노:그래도 좀 더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이 좋지 않겠십니까? ‘6자회담의 진전에 맞춰 가장 이른 시일 내 핵무기와 핵물질 및 모든 종류의 핵 프로그램과 관련 시설을 폐기하기로 했다’고 하면 어떻겠십니까?

김:나보고 먼저 홀딱 벗으라 이 말이오? 로 대통령 같으면 그렇게 하갔시오? 반세기가 넘도록 미국은 공화국을 압살하려고 態횬?돼 있소. 이에 대한 자위책으로 우리가 택한 것이 ‘선군정치’구, 그 핵심이 핵 억지력이란 말이오. 최근 들어 이라크다, 아프간이다, 이란이다 해서 자기들 사정이 어려워지니까 우리한테 추파를 던지고 있지만 적대시 정책을 포기했다는 증거는 없시요. 우리가 만나고 있는 이 순간에도 남쪽에서는 을지포커스다 뭐다 해서 전쟁연습이 한창이라 이 말이오.

노:핵 포기 의지가 확실하다고 믿을 수만 있으면 미국도 뭐하러 피곤하게 적대시 정책을 계속하겠십니까? 부시 행정부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북측에는 최고의 기회 아닙니까? 2·13 합의가 이행되는 종착점에 가면 김 위원장이 핵을 완전하게 포기할 거라는 확신만 심어줄 수 있으면 모든 게 착착 굴러갈 수 있다 아닙니까. 그러니 좀 더 구체적으로 핵 포기 의지를 밝히는 것이 좋다 이 말입니더.

김:이미 밝히지 않았습네까? 포기하갔다니까요. 미국이 적대시 정책을 포기하면 우리도 핵을 완전하게 포기하갔다 이 말입네다. 한반도 비핵화는 수령님의 유훈입네다. 분명히 말하지만 우리의 핵 억지력은 남측을 겨냥한 게 아닙네다. 같은 민족끼리 왜 우리가 핵전쟁 놀음을 벌여야 합네까? 미국 때문입네다. 핵 문제는 미국하고 해결할 문제지, 로 대통령과 따질 문제가 아닙네다. 그런데도 내가 이렇게까지 한 건 로 대통령을 배려해서입네다. 평양까지 왔는데 빈손으로 보낼 수 없지 않습네까? 선거를 앞두고 국내정치 상황도 있을 것이고, 미국과의 관계도 있을 것이고. 그래서 로 대통령께 ‘선물’을 드리갔다 이 말입네다. 그걸 모르시갔습네까?

노:압니더. 하지만 이왕 줄 거면 한 번 통 크게 주시면 안 되겠십니까?

김:선물이야 주는 사람 마음이지 받는 사람이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습네까? 받기 싫으문 그만 두든가.

노:아닙니더. 받겠십니더.

김:역시 로 대통령 하고는 시원시원한 성격이 서로 통하는 것 같습네다. 자, 기럼 핵 문제 얘긴 요 정도 하구, ‘우리 민족끼리’ 통 크게 한 번 해보는 문제로 넘어갑시다. 하하.
  김 위원장의 호탕한 웃음소리에 잠에서 깼다. 꿈은 역시 꿈일 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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