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를 위한 다섯가지 의제/한승주 외무부장관(특별기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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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국제화는 동·서양의 조화다”/피해의식 방어적 외교 벗어날 때/보편적 세계문화에 관심을/의식/민주화의 성공 구체화 절실/가치/국가경쟁력이 최우선 과제/정책/국민역량과 지적수준 제고/능력/각종규제·관행·법규정 개선/제도
올해는 국제화의 해가 될 전망이다. 외교에 있어서는 물론이고 국내적으로도 그렇다. 우리 민족이 21세기를 맞아 웅비하기 위해서는 국제화가 필수적이라는데는 모두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국제화 추진에 가장 중요한 것은 국제화 「어젠다(의제)」를 통해 우리가 실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설정하는 것이다. 국제화라는 말은 예컨대 「세속화」,또는 「종교화」라는 말처럼 그 자체가 특정한 의미를 갖고 있는 말이 아니다. 따라서 국제화는 한마디로 정의하기도 어렵고,굳이 정의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국제화를 통해 얻으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살펴봄으로써 귀납적으로 국제화를 정의하고 그 의제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국제화를 통해 우리가 얻고자하는 것은 우리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세계속의 한국으로서 우리의 위치를 정립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국민 각자의 생활을 정신적·물질적으로 풍요롭게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가 검토하고 시행해야 할 국제화 의제를 의식·가치·정책·능력·제도 등 다섯가지 면으로 생각해 볼 수가 있다.
의식면에서의 국제화는 우리가 세계시민정신을 갖는 것이다. 세계시민정신이란 우리가 외국인과 외국문화에 개방적이고 동등한 자세를 갖는 것이며 보편적 세계문화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국제화가 우리 민족의 자주성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함으로써 다른 민족과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이를 통해 우리 민족의 발전을 추구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자주적 세계시민의식은 우리의 것에 대한 소박한 자신감과 남의 것에 대한 관용에서 출발한다.
가치면에서의 국제화는 세계화라고 표현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이는 자유·정의·평화·복지 등 인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민주화로 포괄되는 이러한 가치들은 21세기의 시대정신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바로 우리 신외교의 세계화 기조 내용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러한 가치들을 문민정부 출범이후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민주화의 성공을 통해 구체화시켜야 하며 우리의 가치체계안에 흡수하고 융화시켜야 한다.
정책면에서의 국제화는 국경을 초월하는 생산과 자본의 세계화 흐름속에서 우리의 경쟁력을 증대시킬 수 있는 정치·외교·경제·사회정책을 펴는 것이다. 특히 경제통상정책면에서 전지구를 우리의 시장,활동영역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국제사회에서의 우리의 권리·의무에 대한 균형된 인식을 갖는 것이다. 국가간 상호의존성이 심화되고 지역간 통합이 증대됨과 동시에 단일국가만의 노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군축·환경·빈곤 등의 문제가 등장했다. 우리는 세계문제가 곧 우리 문제라는 인식하에 범세계적 문제의 해결에도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능력면에서의 국제화는 우리 개개인의 역량과 지적수준을 국제 최고수준으로 끌어올리자는 것이다. 국가경쟁력이라는 것은 결국 국민 개개인 역량의 총화이며,개인의 능력향상은 국가경쟁력 향상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능력에 있어서 외교능력·과학기술능력·사회와 기업경영능력이 중요하다. 외국에 대한 지식,외국어능력을 함양해 외국과 당당히 교섭하고 대등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이를 위해 교육의 국제화는 특히 긴요하다.
제도면에서의 국제화는 각종규제·관행·법제도의 개선을 의미한다. 이는 우리 제도가 국제사회에서 통용되는 기준 및 수준과 조화를 이루도록 하자는 것이다. 또한 민간부문의 자율성을 증대시켜 국제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정부의 보조능력을 충실히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제도면에서의 국제화중 경제통상과 관련된 부문에 있어서는 어려움도 예상된다. 우리가 시장을 폐쇄하면 상대도 시장을 폐쇄한다는 균형감각과 상대주의적 인식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다섯가지 어젠다를 통해 국제화를 살펴보았다. 국제화가 시간적으로는 미래화를 뜻한다면 공간적으로는 서양화가 아니라 동·서양의 조화,즉 한국과 세계의 조화를 뜻한다. 우리가 서양의 햄버거와 피자를 먹고 서양이 동양의 김치와 스시를 먹는 것을 말한다. 우리에게 국제화란 과거와 미래의 관계속에서 현재를 모색하고 서양과 동양을 동시에 품으면서 21세기를 준비하는 것이다.
우리는 비록 지리적으로는 대륙과 연결되었으나 지정학적으로는 섬나라와 다름없다. 이런 상황에서는 우리의 외국에 대한 현실적 시각이 중요하다. 외국이 자국의 이익만 추구한다는 비판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외국의 행태에 대한 도덕적 평가를 내리기 이전에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노력을 해야 한다. 각국은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지만 꼭 의도하는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그것이 타국에 피해가 되는 것만도 아니다.
역사적으로 우리 민족은 외부세력으로부터 피해를 보아왔기 때문에 피해의식을 갖는 것은 한편으로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이런 피해의식 때문에 대외관계에 있어서 늘 방어적으로 나가야만 하느냐는데는 문제가 있다. 우리가 자주성을 지향하면서 실제 인식에 있어서 너무 피해의식을 갖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는 이제 종합적 국력과 국민의 자질면에서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역사적 단계에 와 있다. 우리는 국제화를 통해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나라를 만들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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