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사람>국내유일 옻줄 바둑판 제작 棋盤師 김복규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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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한개의 바둑판이 완성되기까지는 실로 많은 품이 든다.원목을 고르고,제재하고,건조시킨 후 자르고,대패질하고,響穴을 파고,다리를 붙이고,칠을 하고,줄을 쳐야만 비로소 한 개의 바둑판이 만들어진다.
모든 공정이 다 중요하다.그러나 가장 긴한 것은 역시 마지막공정인 줄치기다.씨줄과 날줄을 각기 19줄 입혀야만 비로소 3백61줄의 四通八達이 그려진다.畵龍點睛.바로 그것이다.무심한 나무에 혼을 불어넣어 인생의 喜怒哀樂을 담는 바 둑판을 만드는것이 바로 줄치기다.
바둑판의 줄은 먹줄과 옻줄이 있다.먹물을 이용해 선을 친 먹줄 바둑판은 물이 묻으면 번질 수밖에 없다.그러니 자연 먹줄을입힌 후 두껍게 래커칠을 해야만 한다.
칠이 벗겨지면 이내 줄도 흐려지게 마련이고 나무의 고유한 색과 결,향과 질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와 달리 옻줄 바둑판은 옻이 나무와 결속,깊숙이 흡수된다.
옻이 나무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초칠을 할 뿐 원목 그대로다.
나무 고유의 결과 무늬가 그대로 살아 있고 木香이 은은하다.
먹줄 바둑판의 수명은 길어야 4~5년.그러나 옻줄을 입힌 바둑판은 20~30년이 지나도 선명할 뿐만 아니라 더욱 깊은 맛을 담아낸다.
먹줄 바둑판은 래커칠에 의한 반사로 바둑을 오래 둘 경우 눈이 피로하다.따라서 일본 프로기사들은 반드시 옻줄 바둑판으로 대국에 임한다.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거의 먹줄 바둑판을 사용해왔다.그에 비해일본은 일반 기원에서조차 옻줄 바둑판을 사용한다.먹줄 바둑판은오히려 찾아보기 힘들다.우리나라는 棋力은 세계적이나 바둑판 수준은 그렇지 못한 형편이다.
옻줄 바둑판을 만 드는 장인을 棋盤師라 한다.
일본에선 기반사로 불리는 가문이 20여곳 있다고 한다.그러나국내에서는 金福奎씨(40)가 유일하다.
『옻줄 올리는 기술을 익히려고 일본에 갔어요.하지만 말도 잘안통하고 제대로 가르쳐주려고 하지 않아 무진 고생을 했지요.』83년 金씨는 29세 나이로 渡日했다.
결혼한지 1년도 채 안된 신혼때였다.영등포공고를 나와 줄곧 남대문시장에서 장사를 하던 그는 어느날 매형인 趙祥衍씨(趙治勳의 형)로부터 옻줄 바둑판 얘기를 듣고 渡日을 결심하게 된다.
아내의 반대를 무릅쓰고 단신으로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수소문 끝에 바둑판 제작을 가업으로 잇고 있는 마루야마(丸山昭彦)가문의 연수생으로 들어가게 된다.
마루야마는 일본에선 유명한 기반사다.후지산 아래 고후 야마나시(甲府山梨)에 터를 잡고 4대째 완벽한 바둑판을 만들고 있다. 『일본에서 옻줄치기는 자기 마누라에게도 비밀로 한다고 할만큼 비법으로 전수되고 있습니다.자식에게만 가르치죠.자식이 없으면 데릴사위를 얻어 대를 잇도록 합니다.』 처음 얼마동안은 나무에 물주고 빨래하는 허드렛일만을 해야만 했다.그러나 눈썰미가좋고 꼼꼼한 그는 주인의 눈에 들어 나무를 다루는 일부터 시작,차차 기술을 익혀나갔다.
그는 새벽이면 몰래 일어나 작업장에 가서 낮에 눈여겨 보았던대로 옻줄을 쳐보고는 남들 모르게 대패로 감쪽같이 갈아놓곤 하는 각고의 세월을 보냈다.옻줄의 入線은 옻의 배합,묻히는 속도와 입히는 속도의 균일함등 기술도 기술이지만 精神 一到가 중요하다고 한다.마음가짐과 몸이 일체를 이루어야만 곧고 바른 옻줄을 칠 수 있다는 것이다.월급없이 일을 도와주며 기술익히기를 3년. 그는 자신감이 생기자 곧 귀국했다.외국인으론 유일하게 함께 연수했던 미국인 보루씨(44)는 중도하차,로스앤젤레스로 돌아갔다.
그는 현재 경기도 광주 남한산성 아래 외딴집을 빌려 작업장을꾸미고 옻줄 바둑판을 다듬고 있다.소음이 있는 곳에서는 옻줄이제대로 쳐지지 않기 때문이다.
바둑판은 본래 비자나무로 만들어야 제멋이 난다.향이며 결,돌을 놓을 때의 경쾌함이 그만이다.그러나 우리나라에는 바둑판을 만들만큼 다 자란 비자나무가 없다.바둑판이 되기에는 최소 지름1m20㎝의 아름드리 나무가 필요하다.
그는 재목을 구하러 가끔 인천항에 나간다.인도네시아에서 수입되는 원목을 고르기 위해서다.
현재 국내에서 만들어지는 바둑판은 대체로 印尼産 아가지스나무로 만들어진다고 한다.원목은 그가 원하는대로 제재되어 광주 작업장으로 실려온다.그곳에서 3년간 자연 건조된 후에야 비로소 바둑판으로 다듬어지게 된다.
일본에서는 본래 칼날을 무디게 한 日本刀로 옻줄을 친다고 한다.현재 그는 일본도 대신 장칼을 만들어 옻줄을 치고 있다.
『아직 옻줄 바둑판에 대한 인식이 부족합니다.배우려는 젊은이도 없고요.하지만 불모지인 이 땅에 옻줄 바둑판 제작기술을 정착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는 오래 붙어있지 못하고 떠나는 젊은이들을 보내고 혼자 외롭게 작업하고 있다.지난 가을에는 앞마당에 비자나무를 심었다.앞으로 수백년은 지나야 재목이 될테지만 계속 심을 작정이다.
또 중국에 가서 비자나무를 구해다 명품도 만들어볼 계획이란다.정작 바둑판은 수없이 만들었지만 그의 바둑 실력은 겨우 5급.그러나 名局 棋譜를 보며 감상하는 시간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라고 한다.
〈李順男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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