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환희와좌절>12.농구대표 서장훈의 일장춘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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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선배들이 24년동안 이루지 못했던 것을 내가 들어감으로써 이룰 수 있다면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
만 스무살도 되지않은 대학1년생이 국가대표에 뽑힌 것만 해도영광스런 일인데 내 활약으로 중국을 꺾고 우승을 차지한다면 그이상 더 바랄게 없을 것같았다.
기분으로는 가능할 것같았고 자신도 있었다.
우리는 제17회 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대회 준결승에서 숙적 중국과 맞붙게 됐다.그날은 11월20일이었고 경기가 벌어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세나얀 이스토라체육관을 꽉 채운 관중들은 일방적으로 중국을 응원했다.한국을 떠나올 때부터 「이번 에야말로 중국을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중국은 예선전에서 사우디아라비아에 잡히는등 전력이 약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는 자신감을 갖고 코트에 나섰다.중국만 잡으면 우승은 따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감독님은 나에게 중국의 장신센터 산타오(2m15㎝)를 밀착마크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나보다 7㎝가 큰 산타오를 과연 잘 막아낼 수 있을까 걱정이앞섰다. 그러나 8강전에서 일본의 야마자키(2m16㎝)도 잘 막아내지 않았던가.마음을 가다듬고 코트에 들어섰다.
전반전에는 양팀 모두 긴장했는지 지독히도 슛이 안들어갔다.그런 가운데서도 경은(文景垠)이형과 동희(姜東熙)형의 활약으로 24-17까지 리드하면서 우리는 약간 들뜨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런 기분도 잠깐,침묵을 지키던 중국의 류유동(2m).순준.후웨이동(이상 1m97㎝)등 장신 포워드들이 리바운드에가세하면서 양상이 달라졌다.
산타오와 몸싸움하는 사이 어느새 이들이 달려와 볼을 낚아채며2차.3차 슛을 쏴대는 통에 게임은 순식간에 뒤집어졌다.뻔히 눈뜨고 공격 리바운드를 자꾸 허용하니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다.
후반들어 나는 기범(韓基範)이형과 교체돼 물러나와야 했다.그러나 기범이형이나 희철(全喜哲)이형도 속수무책인 것같았다.
연거푸 10점을 먹으며 점수가 47-37까지 벌어지자 온몸에힘이 쭉 빠져버렸다.평소 그렇게 잘들어가던 경은이형이나 동희형의 슛이 그날따라 왜 그렇게 안들어가는지.자유투까지 링을 맞고튀어나올 때는 미칠 것같았다.
결국 첫 대결에서 중국을 꺾어보겠다는 나의 소망은 수포로 돌아갔다. 경기장을 나서면서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내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 다시 보자.』 올겨울 나는 민첩성과 순발력 훈련을 집중적으로 할 것이다.
내년에는 반드시 중국을 잡기 위해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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